활동가의 편지

게시물을 지울 수 없는 이유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처음 자원 활동을 시작한 2005년, 난생 처음 노동절 집회에 참가했다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서명지를 마주쳤다. 왠지 꺼려져 피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연상했던 것 같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반미운동… 북한.

그 후 사람들과 함께 평택에 쫓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평택 투쟁이 북한이나, 모종의 법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어떤 인식과 안도감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다. “국”으로 시작하는 모종의 법과 인권운동사랑방이 거기에 맞서 싸워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자유는 늘 시민.정치적 권리 목록의 첫번째로 나오는 것들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문제는 늘 나와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지우라는 공문

경찰 보안과에서 사랑방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북한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게시물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지우라는 협조 공문을 보내오기 시작했을 때, 내심으론 그냥 지워버리고 싶었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 방문자들이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들. 별로 읽고 싶지 않은 글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북한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단체에서 활동했던 옛 사람들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감행했던 예전의 실천들을 생각하면, 경찰 나부랭이들이 깔짝댄다고 손쉽게 굴복해 지워버리는 것이야말로 내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딱히 안지우고 버틴다고 저들이 그냥 넘어갈 리도 없을 터.

경찰은 방송통신위원회에 통보만 하고,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를 다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보내 내용 심의를 의뢰하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내용 심의를 하되 ‘강제성 없는’ 삭제 권고만 하고, 우리가 권고를 이행하지 않자 다시 방송통신위원회가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강제성 있는’ 삭제 명령으로 바꿔 내리는, 국가 기관들끼리 검열의 책임을 회피하는 검열의 분업 프로세스가 점차 진행되는 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명령을 취소해달라는 행정 소송을 제기하여 진행 중이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어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지는 않는다.

지우라는 글들을 직접 읽어보면

의견서를 쓰며 재판에 대응하기 위해, 지우라는 20개의 글들을 비로소 하나 하나 제대로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이 글들이 남한 체제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추상적인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여러 고민을 들게 만드는 글들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를 소개해본다.

다음은 삭제명령을 받은 게시물 중, http://old.sarangbang.or.kr/bbs/view.php?board=freeboard&id=16305에 실려 있는 몇몇 글들 중 하나이다.

외과의사의 3대 기질

세상에 직업 수는 수천수만 가지를 헤아리며 그 수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매 직업들은 그에 고유한 기질적 특성을 요구한다. 만약 직종이 요구하는 기질이 없을 때 그는 자기 맡은 일을 효과적으로, 능률적으로, 책임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질적 특성에 대한 요구는 결코 등한시할 것이 못된다. 인간 생명의 기사인 의사인 경우에 기질적 요구는 더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

그러면 의학의 한 분과인 외과 의사들은 어떤 기질을 가져야 하는가?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외과의사가 지녀야 할 기질적 특성에 대해 영민한 두뇌와 큰 심장, 정교한 손이라고 지적했다. (…) 지적 능력을 끊임없이 높여 영민한 관찰력과 사고력을 가져야 한다. (…) 또한 외과의사는 심장이 커야 한다. 수술은 인간의 생명 앞에서 분초를 다투는 매우 긴장하고도 책임적인 일이다. (…) 외과의사는 손에 익은 정교한 수술 솜씨를 가져야 한다. 수술 칼을 잡은 외과의사의 손은 언제나 부드럽고 재빠르며 바른 곬을 따라 움직여야 하며 그 어떤 복잡한 수술도 고르고 가지런하게 해내는 그런 수술 솜씨를 보여주어야 한다.

유명한 의학대학의 노련한 교수의 강의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외과의사의 3대 기질. 김 위원장이 밝힌 외과의사의 기질에 대해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 위원장은 수술 칼을 잡는 외과의사는 아니지만 의학에 정통했기에 어느 의학교수나 박사도 내놓지 못한 새롭고 독창적인 정의를 내린 것이다.

진정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문가들을 뛰어넘는 의학의 대가이다.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 7조에 대해 한정 합헌 결정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소정의 찬양·고무·동조 그리고 이롭게 하는 행위 모두가 곧바로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행위일체를 어의대로 해석하여 모두 처벌한다면 합헌적인 행위까지도 처벌하게 되어 위헌이 되게 된다는 것은 앞서 본 바이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서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무해한 행위는 처벌에서 배제하고, 이에 실질적 해악을 미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로 처벌을 축소제한하는 것이 헌법 전문·제4조·제8조 제4항·제37조 제2항에 합치되는 해석일 것이다. 이러한 제한해석은 표현의 자유의 우월적 지위에 비추어 당연한 요청이라 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한다 함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협 침해하고 영토를 침략하여 헌법과 법률의 기능 및 헌법기관을 파괴 마비시키는 것으로 외형적인 적화공작 등일 것이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준다 함은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 즉 반국가단체의 일인독재 내지 일당독재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자유·평등의 기본 원칙에 의한 법치주의적 통치질서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고,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 우리의 내부 체제를 파괴·변혁시키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추어볼 때, 위의 "외과의사의 3대 기질"이 국가보안법 7조 1항 찬양 고무죄를 범한 글로서, 정보통신망법 44조의7 3항에 따라 삭제되어야 할 글인가?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 우리 내부 체제를 파괴 변혁”하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왠지 의사 지망생들을 위해 쓴 듯한 위의 글에도, 당연한 듯 북의 최고지도자에 대한 찬양은 들어있다. 그러나 글의 핵심은 결국 외과 의사가 되려면 지적 능력을 높여야 하며, 담력과 정교한 솜씨를 갖추어야 한다는 지당하신 내용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북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빌고 있을 뿐, 북 최고지도자에 대한 찬양은, 마치 우리네 관공서마다 태극기가 걸려있듯, 공공기관에서 제작한 액자에 무궁화꽃이 장식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의례적으로 들어있다.

이 글은 누가 썼을까? 의과 대학이나 그와 관련 있는 사람이 썼겠지. 이 사람이 북 최고지도자를 높이는 표현을 쓸 때, 어떤 광신적 열정을 품고 썼을까? 아니면 공포에 짓눌려 억지로 하기 싫은 말을 강요당해 쓴 것일까? 어쩌면 그 중간 즈음, 제 나라 지도자에 대한 적당한 존경심과 공문서에 스탬프 찍는 듯한, 적당한 사무성을 갖고 쓴 글인 건 아닐까?

북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북의 정치 체제란 결국 저런 느낌이 아닐까, 얼핏 느꼈다.

국가보안법이 강요하는 몰이해

북의 체제나 북의 최고지도자에 대해 긍정적인 문구만 들어있으면 고무 찬양이라며 남김없이 처벌하고 격리하고 삭제하겠다는 국가보안법,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반쪽, 북에 사는 사람들의 좋은 모습, 나쁜 모습,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모습이든, 그 사람들의 생각과 모습을 이해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있지 않은지? 북의 인민들을, 주류매체에 나오는 최고지도자의 사망에 울부짖는 모습이나 굶주림과 억압에 신음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박제된 모습으로만 이해하기를, 두려움과 함께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