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이야기

혐오세력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나에게 혐오란

종북, 동성애자, 여성, 이주노동자 등 혐오의 대상으로 호출되는 그/그녀들의 삶에서 혐오는 어떤 것으로 다가오나요? 나에겐 무엇보다 상처, 모욕이라는 감정의 상태가 느껴집니다. 회복하기 힘든.... 그러나 살려면, 견뎌야하는 그 무엇. 사회적인 시민으로 나서기 힘든 조건-그림자 같은 삶, 투명인간, 비가시적인 존재 등-에서 한국사회에서 호출되는 혐오의 대상들은 뭔가 저항이라도 할라치면 사회적인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이다” 이 구호는 지난 2014년 12월 중순 서울시 청사를 점거농성하며 내걸었던 주장입니다. 보수기독교 세력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보여준 성소수자에 대한 ‘부인’이 그/그녀들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잃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군가에는 목숨처럼 여겨지는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직 우리에게는 혐오를 인권의 문제로 설명할 풍부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침해당한 권리를 설명할 때 무엇을 침해당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즉 사회적으로 침해를 침해로서 인정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제도적인 틀이나 인식이 없다면 그/그녀들의 억울함과 비참함은 그저 하나의 재수 없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북, 동성애자, 여성, 이주노동자 등 혐오의 대상으로 호출되는 그/그녀들은 계속 재수 없는 일에 걸려들어야 하나요?

 

혐오표현이 아니라 ‘혐오권력’이다.

그동안 인권운동은 혐오발언과 행동을 하는 세력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응해왔던 것 같습니다. ‘저러다 말겠지, 관심을 주면 안 돼, 쟤네들은 원래 그래’ 등등.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혐오표현’으로 언어화되는 것이 주는 어떤 자유의 가치에 대해 소극적인 방임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자유가 왜곡되고 있었음에도 그래서, “혐오발언은 ‘표현의 자유’로 옹호될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뭔가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표현이라는 말이 나의 뒷목을 잡아당기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울시 청사에서 있었던 무지개농성에 참여하면서, 공허감이 사라졌습니다. 실제 성소수자들이 혐오와 모욕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목격하고 나도 그 자리에 함께 하면서, 어떤 사회적인 조건을 바꿀 수 있다면 ‘혐오와 모욕 따위’는 공론의 장에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하였습니다.

 

그래서 혐오는 단지 감정, 정서의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혐오가 발화·유지․확대하고 있는 삶의 조건(구조)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내면에 머무는 어떤 혐오표현은 (법적으로 처벌할 수야 없지만) 내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드러낼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과 만나고 이것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혐오로 발화됩니다. 그래서 혐오가 어떤 방식, 어떤 행위를 중심으로 발화되는지 그 맥락과 조건을 같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조건을 말하지 않고 체제로 만들어진 구조를 이야기 하지 않고, 표현의 이야기로만 하면, 뭔가 자꾸 미끄러집니다.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으로 혐오로 대상화되는 ‘종북, 동성애자,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그저 어쩌다 걸려든 존재가 아닙니다.

 

* 종북->국가보안법 체제가 떠받치고 있는 분단과 북의 존재

* 동성애자->섹슈얼리티 등 성의 권리를 통제하고 싶은 견고한 이성애 중심 체제

* 여성->여성 통제를 통해 유지되는 가부장 체제

* 이주노동자->노동시장을 통제하려는 자본 체제

 

혐오표현을 ‘표현’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혐오권력’의 작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공상태의 표현이 아닌 권력의 작동으로 보자는 제안입니다. 혐오는 체제(국가보안법, 이성애, 가부장제, 자본체제)를 뒷받침하는 언어입니다. 또한 혐오세력은 단순히 종교집단 혹은 온라인에만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정치세력화 되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주류 정치세력은 공안집단(군, 국정원, 검찰, 경찰)은 물론이거니와 혐오세력과 같은 ‘사적 폭력’을 적절히 배치하면서 ‘증오/혐오의 정치’를 만들고 있습니다. ‘증오/혐오의 정치’ 효과는 우리 안에서 예외를 만들고 인정해버리는 정치라고 할 수 있지요. 누군가는 당해도 싸, 종북이니까! 동성애자이니까! 여성이니까! 이주노동자이니까! 이런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혐오가 ‘표현의 자유’로 독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마치 이 사회가 표현의 자유를 어떤 사회적인 관계와 권력도 고려하지 않는 초월적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실제 표현의 자유를 누가 어떻게 규제하고 있는지, 그 실태와 조건, 구조를 성찰하지 않은 채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만큼 공허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 사회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구조적으로 들리지 않게/못하게 만드는 국가와 사회 권력의 힘이 작동되고 있지 않은가요. 정희진 씨의 지적처럼 혐오세력은 ‘표현의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혐오에 대한 대응, 현장 ‘권력 감시’ 부터!

광화문 광장에 등장해 폭식을 하던 일베회원을 보면서 대응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서북청년단 결성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서울시청 앞에서 하는 것을 보고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과정에서 보여준 반동성애 세력의 모습은 경악스러웠습니다.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또는 권리가 박탈되어 싸우는 사람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으로 인권단체들은 권력 감시의 영역을 주로 국가(경찰, 검찰, 국정원)로 상정해왔는데, 이제는 혐오세력에 대한 감시활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합니다. 경찰감시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노하우를 통해 사적 권력 감시를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부터 점검부터 해봐야겠습니다. 먼저 혐오세력이 누구이며 어떻게 움직이는지 충실히 모니터가 필요하겠지요.

 

혐오는 특정개인이나 특정집단이 겪는 피해도 있지만 이에 더해 사회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전반적으로 훼손시킨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입니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 인권지수가 훅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미 한국은 OECD 국가 중 관용지수가 바닥을 맴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보다도 증오와 혐오의 정치를 견딜 수 있는, 또 넘을 수 있는 인간존엄에 관한 더 많은 생각과 행동이 아닐까요.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