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세움터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그에 관한 좀 더 친절한 설명

지난 21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탈핵 운동에서 흔히 사용하는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라는 문구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http://cafe.naver.com/asunaro/52722 슬프게도 청소년인권운동의 활동들은 주목을 잘 못 받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성명은 어떤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온라인에서 관련 내용들이 “우리 아이들 논쟁”으로 알려지며 꽤 유명세를 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성명서라는 한 두 페이지의 짧은 글로 많은 혼란과 물음들에 온전히 답을 하지는 못한 듯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더 차근차근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도대체 무슨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것이 청소년인권운동에서 주장하는 의견들과 어떻게 맞닿아있는지 이야기 해 보려 한다.

‘어른’중심적 사회와 ‘어린 것들’에 대한 일방적 보호주의

굳이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아니더라도, 아수나로를 포함한 많은 청소년인권운동단체들은 ‘우리 아이들’ 이라는 수사에 꽤나 오랫동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왔다. ‘우리 아이들’이란 말은 ‘아이들’이 스스로 부를 수 없는 문구이다. 이는 ‘어른’들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아이들’을 배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나 ‘우리 아이들’이란 말을 꽤 쉽게 들을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들이 희망입니다!” 그것은 이 말이 어른들의 연민과 동정심, 그리고 보호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이 너무도 쉽게 내뱉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성인’중심으로 굴러가고 있고, ‘아이들’을 ‘미성년’, 즉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들’ 이 ‘어른들’과 꼭 같이 성숙하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성숙과 미성숙을 논할 때 우리는 성숙함이란 어떤 것이고 그것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완벽한 성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등을 따져보아야 한다. 단순히 나이를 기준으로 미성숙한 집단을 나눠버리는 것은 성별을 이유로, 인종을 이유로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해왔던 다른 차별 사례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 사람들을 미성숙하다고 쉬이 간주하는 행위는 어린 사람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야만 한다는 ‘보호주의’로 나아간다.

여러 곳에서 여러 번 말해왔지만 ‘보호주의’와 ‘보호’는 다른 것이다. ‘어른’들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보호를 필요로 한다. 물론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약자이니만큼 더 많은 상황에서 다양한 맥락에 따른 보호가 필요하다. 반면, ‘보호주의’란 ‘아이들’을 몽땅 모든 영역에서 강제적인 보호의 대상으로 묶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보호주의적인 시각은 이런 식으로 발현된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시행하겠다고 밝힌 스마트폰강제규제어플 ‘아이스마트키퍼’는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스마트폰 기능을 그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차단해버린다. 학생의 동의를 거친다고 하나, 그 과정은 마치 야간자율학습이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것과 거의 동일할 뿐이다. 이런 뜨악한 감시와 규제를 벌이는 ‘아이스마트키퍼’의 이름은 아이들을 스마트폰의 폐해에서 지켜준다는 뜻이다. 난데없이 모든 서울시 학생, 청소년들을 스마트폰에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보호주의’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스마트폰의 사용과 기능을 감시, 차단했다. 정작 당사자인 ‘아이들’은 그를 필요로 하지도, 필요하다고 말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는 ‘보호’가 아니라 보호라는 이름으로 어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일 뿐이다.

진보적이라는 운동사회 역시 위의 상황들과 별반 다르지 않고, 여전히 그렇다. 2007년 촛불이 거세지고 10대들이 ‘촛불소녀’로 호명되며 거리로 나왔을 때 운동사회의 ‘어른’ 단체들은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는 종이홍보물을 배포했다. 무엇으로부터 지켜주자는 것인지 잘 알 수도 없는(정치로부터? 광우병으로부터? 이명박으로부터? 그렇다면, 왜 ‘아이들’만?) 저 문구는 ‘취약함, 보호욕구를 자극하는, 자신들보다 낮음’을 함축하고 있는 ‘아이들’의 이미지를 재생산했으며, 매우 잘 소비되었다. 자발적으로 집회에 나온 40대의 중후한 중년 남성을 ‘지켜주자’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어린 것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은 이렇듯 어른들의 괜한 보호욕구에 의하여 쉽게 무시되며, 결국 어린 것들은 고작 나이라는 요소로 인하여 어른들과 무언가를 동등하게 말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은 어떤 ‘미래세대’를 뜻하는 것일까

아, 이번 논쟁의 핵심이 되었던 문구는 ‘우리 아이들’ 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라는 점을 이쯤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앞의 보호주의에 기반을 둔 언사들이 자신들을 철저히 ‘어른’ 과 ‘보호자’로 상정하고 있는 반면,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은 누가 말하고 있는지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무슨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는 많은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이란 미래 세대를 뜻하는 것이다. 핵 없는 세상은 현재 우리 세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이 구호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런 말-들에 ‘정말?’ 이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여러모로 보아도 꽤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된다.

핵발전소는 현재의 저비용과 고효율을 위해 위험과 환경파괴를 몇 십 년과 몇 백 년 후로 떠넘기며 운영된다. 현재 세대들은 살아있는 동안 위험이 발생하지 않길 바라고, 미래의 리스크를 외면한다. 그렇다. 핵발전이 함부로 미래를 저당 잡은 현재의 착취이니만큼 반핵운동이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을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담백하게 정말 이러한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 속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이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누구로 여겨지느냐를 알아야 하며, 그 발화자가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가도 꼭 짚어봐야 한다. 이 구호를 외치는 반핵과 녹색 운동단체들은 그렇다면 어떠한 맥락을 가졌던 것일까.

녹색운동에서 꽤 큰 역할을 하며 녹색평론의 편집자이기도 한 김종철씨는 과거 어떤 강연회에서 “얼마나 애들이 약합니까. (...) 약간 손지껌하면 체벌이라 이러고, 물론 저도 체벌은 안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부모가,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를 선생이 가르치는데 있어서 때때로 매질을 안 할 도리가 없잖아요. 안 하는 게 이상하지... ” 라는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올랐다. 김종철씨 개인을 비난하기 위해 끌어온 기억은 아니다. 해당 강연의 내용에 대하여 다른 녹색운동 모임에서 문제제기를 했지만, 그것은 왜 20대인 자신들을 비하하느냐는 것에 중점이 맞춰져 있었을 뿐, ‘아이들’에 대한 체벌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니었다.1) 이렇듯, 녹색운동을 하는 상당수의 ‘어른’들이 가족주의와 청소년보호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녹색을 가치로 하는 대안학교에서는 생태주의적 삶을 이유로 학생들의 휴대폰을 강제수거하기도 하며, 녹색을 말하는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컴퓨터를 금지하거나 강제로 채식을 시키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귀농과 맞닿아있는 어떤 생태운동은 전근대적인 농경시대의 가족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버리는 오류도 심심찮게 보이고 있다. 경기 녹색당은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꿈 피어라! 교육예산 잘 쓰면 우리 아이들이 행복합니다.” 라는 플랜카드를 걸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은 결코 담백한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기인한 문구’ 라고 보이지 만은 않다.


이런 ‘아이들’을 억압하며 ‘아이들’에게 차별적인 맥락은 꼭 녹색운동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인권운동과 아수나로는 그동안 ‘아이들’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며, 소수자를 차별하는 모든 운동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왔다. 아수나로는 심지어 아수나로와는 정 반대의 입장을 가진 청소년 단체였으나 그 단체를 “어른들의 정치이념놀이에 희생양”이 되었다고 한 교육단체를 비판하기도 했었으며2),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은 퀴어문화축제의 청소년을 배제하는 뒷풀이 문화에 대한 비판과 대응을 하기도 했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드넓게 드리워진 어린 것들에 대한 차별을 바꿔내기 위함이다. 그만큼 어린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만연하며, 그래서 사실 청소년인권감수성을 특별히 보인 발화자가 이런 말을 하지 않은 이상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란 문구는 차별적인 맥락을 담기 십상이게 되는 것이다.

이번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문구의 ‘아이들’ 차별적인 맥락은 굳이 발화자의 역사를 일일이 다 따지거나, 우리 사회의 차별적 태도를 찬찬히 읽어내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쉽게 짚어낼 수 있긴 하다. 애초 이번 문제제기의 발단을 제공한 3월20일 ‘아이들에게 핵없는 세상을!’ 탈핵 강연의 홍보 문구는 이러하다.
내가 먹는 음식,
내 아이가 뛰어노는 이 땅,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안전할까요?

'김00'교수의 강좌는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다.
1. 방사능으로 오염된 일본산 식품이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현실
2. 알게 모르게 매일 세슘, 플루토늄을 먹고 사는 내 아이와 가족
3. 핵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들이닥친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출처 ‘인천녹색연합’)

이 홍보문구가 호명하는 ‘아이들’이 담백하게 ‘미래세대’가 아니라는 것은 여기서 명확하다. ‘음식은 ‘내’가 먹으며, 이 땅은 ‘내 아이’가 뛰어논다. 세슘, 플루토늄은 ‘내 아이와 가족’이 먹고 산다. 이 강연회의 주제는 탈핵과 가족이 아니라 ‘핵이 현재 우리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 홍보문구는 철저히 ‘아이들’을 자녀로 둔 ‘나’, 즉 ‘어른’만을 반핵과 탈핵 운동에서의 주체로 상정하며, 핵이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그 ‘어른’들과 함께 핵의 위험을 몸소 겪고 있는 ‘아이들’을 운동에서의 비주체, 더 나아가 “세슘과 플루토늄으로부터” 지켜줘야 하는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담백하게 미래세대를 뜻할 수 없다면, 해당 문구를 ‘미래세대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라 고치면 이 타자화와 배제, 강제적인 보호주의의 굴레를 모두 벗을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미래세대라는 말 역시 위험하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꼭 따라붙던 수식어는 ‘미래의 일꾼’ 혹은 ‘미래의 희망’이었다. ‘자라나는 새싹’ 역시 ‘아이들’을 수식하는 보편적인 언어이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오래, 미래까지 살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그들을 ‘미래’로만 묶어두는 것은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현재를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자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현재를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된다. 현재의 ‘아이들’이 현재를 사는 주체임을 부정당하며 미래로 묶여지게 되기에, ‘미래세대’라는 단어 역시 자연스럽게 이러한 함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찾지 않고 ‘미래세대’를 검색한 포털 첫 페이지만 들여다 봐도 이런 말들이 뜬다. 그리고 여기서 ‘미래세대’는 모두 현재 살아있는 청소년을 뜻한다. <br />

▲ 특별히 찾지 않고 ‘미래세대’를 검색한 포털 첫 페이지만 들여다 봐도 이런 말들이 뜬다. 그리고 여기서 ‘미래세대’는 모두 현재 살아있는 청소년을 뜻한다.


‘우리 아이들’이란 문구만이 문제는 아니다

탈핵운동이 굳이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은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문제의식 없이 활용하는 것이며, 이런 활용은 청소년 보호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도 기여하게 된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나이 어린 집단을 탈핵운동의 주체로 포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청소년인권운동은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란 문구에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논란이 된 성명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핵 없는 세상을’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반핵과 탈핵을 주장하는 것, 더 많은 사람들이 핵 없는 세상을 곧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탈핵에 대한 강연회를 열고,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이유 아닌가요?” 아수나로의 성명의 일부이다. 뭐 더 좋은 대안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사능으로 오염된 일본산 식품이 우리나라에 유통되고”,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가 세슘과 플루토늄을 섭취하고”, “핵의 세상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 다면 우리는 아이들, 어른 그리고 그 외 어떤 구분도 없이 모두 함께 ‘핵 없는 세상을’ 외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만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혹은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를 녹색당과 아수나로 사이의 논쟁을 통해 접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청년녹색당은 이번 일을 계기로 “청소년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를 배제하는 언어사용이 없었는지 되돌아볼” 것을 표명하였고, 녹색당은 내부의 의견을 수렴해서 곧 입장을 내겠으며, 더 풍부한 논의를 위해 아수나로와 함께 간담회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주었다. 거듭 밝히듯 아수나로의 이번 문제제기는 녹색당만을 타겟으로 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또한 녹색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녹색/환경운동, 그 이외 다른 많은 운동사회,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의 나이에 따른 위계와 청소년보호주의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더 많은 문제제기와 더 많은 행동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더 많은 마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제기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무례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현실을 잘 모르는 투정으로 치부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회운동은 그러하듯, 청소년인권운동 역시 같은 ‘운동’으로써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며, 이 글을 읽는 여러 분들이 함께 해주셨으면 할 것이다.

1) http://m.cafe.naver.com/waithongbo/1788(김종철님의 강연록에 대한 문제제기)
2)http://cafe.naver.com/asunaro/36015 “[논평] 청소년단체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의 활동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입장에 대해“

덧붙임

수수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