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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것들의 말꼬투리 잡기

무엇이 우리를 예의 없게 만들었나

얼마 전, SNS상에서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라는 구호가 뜨거운 논쟁이 되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뜨거운 논쟁거리로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자는 구호가 아동․청소년을 보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탈핵운동의 주체로 서기 어렵게 한다는 논지의 성명을 계기로 이번의 논쟁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몇 해가 지나도 끊이지 않는, 똑같이 시작해서 똑같이 흘러가는 변주곡으로만 보인다. 많은 기존 운동들에서 보이는 청소년인권 친화적이지 않은 구호나 프레임에 대해 청소년 운동이 문제제기 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소년활동가들에게 대뜸 반말을 하는 상황부터, ‘아이들’ 같은 단어가 포함된 구호에 이르기 까지 여러 가지 사례들에 대해 청소년단체와 활동가들은 단체적/공식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문제제기를 해 왔다. 이런 경우 우리가 경험하는 반응들은 대부분 방어적이거나 심지어는 권위적이었다.

우리는 왜 말꼬투리를 잡는가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운동에서 하는 문제제기들이 사소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전체를 보지 못하고, 너무 깐깐하다는, 거칠게 말하면“왜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냐”는 반응을 보인다. ‘아이들’ 혹자에게 이것은 그저 아동․청소년을 타자화하거나 비하할 의미를 추호도 담지 않고 쓴 하나의 단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어휘가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 이 단어가 의도하는 이미지들이 버젓이 있는데도, 비하의 의도를 담지 않고 ‘자연스레 쓸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에 우리는 주목한다. 아동․청소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전혀 청소년인권 친화적이지 않은 것들이 ‘그런 것 쯤’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아이들’이라는 단어가 기성세대를 대상으로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반응에도 함께 적용해 볼 수 있는 문제의식이다. 왜 청소년들은 운동의 전략적 홍보대상이 아닐까? 청소년을 설득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번 더, 자연스럽게 ‘우리’와 ‘아이들’은 구분된다. 아동․청소년을 운동의 주체, 혹은 설득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 비청소년의 입장에서 지극히‘자연스러운’ 무의식의 흐름이 언어로 나타나는 것을 포착할 때, 청소년운동은 ‘말꼬투리’를 통해 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우리는 다음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면 어떤 표현을 쓰면 될까요?” 언뜻 꽤나 괜찮은 해결 상황인 듯 보이나 힘이 쭉 빠지게 된다. 기존 운동에서 청소년도 주체로 설 수 있기 위해 지금까지 어떤 부분들이 청소년을 배제하고 사고되어 왔는지에 대해 관점을 바꿔서 고민하는 대신, 그저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청소년활동가들은 기계적으로 ‘새로운 질문’ 대신 ‘다른 정답’을 들고 와서 이렇게 저렇게 바꿔 달라고 주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청소년 운동 하는 사람들 무섭다.’, ‘말 한 마디 잘못 하면 큰일 난다.’는 식의 이미지뿐인, 씁쓸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잡는 ‘말꼬투리’는 그저 한 마디의 말이 아니라 인식과 고정관념의 변화에 대한 요구인데도.

‘예의’라는 진흙탕

청소년활동가들, 혹은 청소년단체의 문제제기가 그 내용이 아니라 태도나 모양새에 대해 평가받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다. “너무 과격한 거 아닌가요?”라던가 “문제제기 이전에 예의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라는 유의 반응들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어떤 지긋한 나이의 남성 비청소년이 집회에서 “요즘 운동이 너무 안일해 졌다. 좀 더 강하게 투쟁해야 한다.” 고 거친 언어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면, 이에 대해 누군가가 ‘문제제기 이전에 예의’를 지켜달라고 주문하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에게 주로 예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쪽과 요구받는 쪽은 대개 정해져있다. 아무리 예의는 ‘상호간에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해 봤자, 많은 경우 나이가 많은 이들이 나이가 어린 이에게 예의를 지킬 것을 주문한다. 이는 자신보다 미성숙하다고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주체가 자신에게 문제제기 했을 때 그 내용과 상관없이 발동되는 방어기제이다. 하는 말이 타당한 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나쁜’것이다.

“문제제기 내용에는 동의하지만 예의를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사실상 “예의를 지켜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문제제기의 내용은 사실상 중요하지 않게 되고, 이야기를 ‘들어줄’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충분히 ‘공손했는지’가 사실상의 갈등지점이 된다. 문제제기하는 상황에서조차 나이권력이 작동하게 된다. 이는 청소년인권 친화적이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고 말고 보다 훨씬 문제적 상황이 된다.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관점의 질문들

이번 ‘아이들’논쟁은 여러 종류의 가지를 쳤다. 그 중에는 물론 사회에 청소년인권의 주장을 던졌을 때 흔히 돌아오는 반응들도 여럿 있었다. 사실상 청소년은 보호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청소년이 주체로 선다면 책임 또한 비청소년과 동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청소년운동은 이 질문에 대해 ‘예’ 혹은 ‘아니오’의 대답이 아니라 다른 시각에서의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청소년을 보호받아야 하게 만드는가? ‘보호’를 위해 보호받는 이의 권리를 제약하는 것은 타당한가? 정말로 청소년‘만’ 미성숙한가?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청소년은 비청소년과 같은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권리와 인식과 기반을 보장받고 있는가? 지금 비청소년이 지는 ‘책임’은 비청소년들에게도 부당하고 무거운 것은 아닐까? 청소년만이 누린다는 여러 ‘혜택들’을 비청소년도 누릴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닐까?

청소년운동이 기존운동판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많은 이들이 하는 말처럼 ‘애꿎은 동지에게 화살을 돌리는’것도 아니고, 사회를 바꿔내는 것보다 ‘만만해 보여서’도 아니다.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운동적 지향점이 있고, 소통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에 문제제기하고, 함께 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에 문제를 제기 한다. 문제제기를 마주했을 때 화를 내거나, 방어하거나 혹은 기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들을 함께 던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덧붙임

둠코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