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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파장? 파장!] 의미 없는 A 등급

독립적인 인권위원 선출위원회 만들어야

개인적으로 '등급'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등급은 보통 무언가를 차별하기 위해 줄을 세울 때, 모욕을 주기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능등급이 그렇고 장애인등급제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모든 등급제도나 평가제도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환경오염이나 안전과 관련해 수준과 등급을 나누는 것은 발전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국가인권기구간 국제조정위원회(약칭 ICC)에서 등급심사를 계속 보류당해서 문제가 되었다. 한국 인권위는 설립 이후 줄곧 A등급을 받으며 국가인권기구로서의 모범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러한 평가는 오간데 없게 됐다. 그 결과 ICC 등급심사 승인소위에서 2014년 3월과 10월, 그리고 2015년 3월까지 세 차례 연속 등급 보류 결정을 받았다.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등급심사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등급하락이나 다름없었다.

ICC가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ANHR, Global Alliance of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으로 이름을 바꾼 후인 5월 중순, 승인소위는 한국 인권위에 대한 등급심사를 했다. 심사결과는 심사 후 10일 만에 한국 인권위에 통보됐다. 그만큼 고심을 했다는 뜻일 게다. 결과는 A등급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에 시원하게 웃을 수 없다. 이유는 인권위도 알고 인권단체들도 안다.

그동안 승인소위가 등급 하락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관행’만이 아니라 한국 인권위에 비해 인권위 독립성이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타국의 국가인권기구도 있으니 쉽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게다가 3월에 이성호 인권위원장이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에서 고령화 실무그룹(Working Group on Aging)의 의장이 됐으니, 등급하락을 결정하기 어려웠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 등 인권단체들이 등급하락을 주장했던 것은 인권위가 거듭나기를 바란 것이고, 그렇게 거듭나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기구의 역할이 증진이 아니라 후퇴되는 것은 사회구성원의 인권의 후퇴도 동반하는 것이니까 그대로 A 등급으로 결정한다면 다른 나라 인권기구의 발전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이 세 번의 등급심사 보류를 결정한 것만으로 한국의 인권위와 한국정부에 엄청난 경고를 한 셈이다.

엉터리 인권위법 개정으로 받은 A등급

하지만 이번 A등급이라는 심사 결과는 한국 인권위의 후퇴를 반영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쉽다. A등급을 받기 위해 정부와 인권위는 엉터리로 인권위법 개정을 하고, 마치 인권위법 개정으로 투명하고 참여적인 인권위원 인선절차가 만들어진 것처럼 포장해서 국제사회에 보고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심사결과는 큰 의미가 없다.

인권위법이 개정된 후에도 지명권이 있는 기관에서는 승인소위가 권고한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투명한 인권위원 인선절차’에 따라 인권위원을 뽑지 않았다. 인권위법이 개정된 후인 새누리당 상임위원 인선절차는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정상환 인권위원은 새누리당 내부에서 만든 인선위원회로 뽑았을 뿐 아니라 개정된 인권위법에서 상향조정된 여성할당제도 지키지 않았다. 도대체 달라진 점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권위가 A등급을 받을 정도로 인권위가 바뀌었나

물론 등급심사 승인소위가 인권위의 노력으로 평가한 것 중 하나가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인권위 공동행동)에 속한 인권단체 대표자들이 작년에 이성호 인권위원장을 만난 사실이다. 인권위가 시민사회와의 협력이 재개됐다고 포장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아직 인권위가 시민사회의 신뢰를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여전히 인권위는 성소수자인권이나 정부가 주도하는 인권침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변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권력의 인권침해에 대해 쓴소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인권위는 강남역 여성혐오에 대해 장애혐오로 대응하는 경찰과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듯이, 일부 보수기독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성소수자 혐오운동에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5월 31일 발표한 인권위원장 성명에서 성소수자는 빠져 있다. 2015년 말 민중총궐기 때 경찰이 쏜 물포를 맞고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 백남기 농민이 있지만 이에 대한 조사나 입장은 아직도 없다. 테러방지법에 대해서는 인권침해라고 한마디 하지 않지만 테러방지법 시행령에 대해선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물타기. 인권의 잣대라기보다는 적절하게 권력의 눈치를 보면 비판수위를 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달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인권위가 변할 수 있도록 견제할 것이다. 인권위가 A등급 유지를 위한 인권단체와의 만남만을 원한다면 비판받아야 한다.

ICC 등급심사를 앞두고 인권위가 마련한 인권위법 개정안이 알리바이일 뿐이라며, 2015년 3월에 인권위가 개최한 <ICC 승인소위 권고의 실효적 이행을 위한 토론회> 불참 선언을 한 인권활동가들

▲ ICC 등급심사를 앞두고 인권위가 마련한 인권위법 개정안이 알리바이일 뿐이라며, 2015년 3월에 인권위가 개최한 <ICC 승인소위 권고의 실효적 이행을 위한 토론회> 불참 선언을 한 인권활동가들


독립적인 인권위원 선출위원회 만들어야

그리고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등급심사 승인소위가 내린 개선 권고이다. 승인소위는 지명권이 있는 정부, 국회, 대법원이 “단일한 독립 선출 위원회가 일관성 있는 선출 절차를 적용하여 절차를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 이제라도 독립적인 선출위원회를 만들어야 최이우 같은 반인권인물이 인권위원이 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작년 19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인권위원 후보인선위원회’를 만들었듯이,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단일한 인권위원 후보 선출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인권위는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권위뿐만이 아니라 지명권이 있는 청와대, 국회, 대법원의 노력이 중요하다. 그리고 지명권이 있는 국가기관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인권위가 등급심사 결과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선절차와 기준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

덧붙임

명숙 님은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 집행위원이자,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