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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x젠더, 재생산을 말하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결정권’ 차원을 넘어 ‘재생산 정의’로

[편집인 주]

한국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은 인구정책의 기조에 따라서 국가로부터 관리되고 간섭받는 영역이었다. 임신을 중단할 것인가 지속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철저하게 국가가 허용하는 사유와 처벌하는 사유가 나누어져 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성관계와 양육 등의 문제에 대해서 장애를 가진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고민하며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기획단이 활동해왔다. 앞으로 8차에 걸친 연재를 통해서 장애/여성의 재생산권리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연재는 비마이너와 공동게재된다.


‘여성의 결정권’ VS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논리의 모순

2010년 3월 5일, 3.8 세계여성의날을 맞이하여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시술 병원 고발운동에 대응하며 결성된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에서  '여성의 임신,출산 및 몸에 대한 결정권 선언'을 낭독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처: 한국성폭력상담소 / 설명: 필자)

▲ 2010년 3월 5일, 3.8 세계여성의날을 맞이하여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시술 병원 고발운동에 대응하며 결성된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에서 '여성의 임신,출산 및 몸에 대한 결정권 선언'을 낭독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처: 한국성폭력상담소 / 설명: 필자)

2012년 8월 23일, 헌법재판소는 임신한 여성의 요청에 따라 낙태 시술을 했을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명시하고 있는 형법 제270조 1항의 위헌소송에 대해서 합헌 판결을 내렸다. 당시 합헌 결정 요지는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사익 VS 공익’으로 대비시키는 이같은 논리는, 자신의 온 몸과 양분을 이용해 수정란에 불과했던 태아를 점차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주체이자 이후에도 아이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존재와 존엄성을 무시한 채 여성들을 단지 사회적 노동력 생산의 도구로서만 다루고 통제하려는 하는 인식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이 논리에는 대단한 착각과 함정이 숨어있다. 마치 이 사회가 ‘사익’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이기심에 대응해 양보할 수 없는 궁극의 윤리적 가치로서 ‘생명권’을 지키고 있는 듯 주장하면서 여성에 대한 처벌로써 낙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미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나 앞으로 태어나 살아가야 할 아이 모두에게 필요한 삶의 조건들을 사회가 변화시켜 나가는 대신 그 책임을 여성들의 선택에만 전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생명권’에 대한 국가의 모순적인 태도는 낙태 허용 사유를 제시하고 있는 모자보건법 제14조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자보건법 제14조 1항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해 놓았다. 심지어 1999년 이전까지는 유전 또는 전염성 질환을 지닌 이들 중 의사가 불임수술을 행하는 것이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보건사회부장관에게 불임수술 대상자의 발견을 보고하게 하고, 장관은 의사에게 불임수술을 명령할 수 있었다. ‘태아의 생명권은 공익’이라는 논리조차, 사실은 그 부모와 아이가 ‘사회적 필요에 부합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판단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는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60-70년대에는 정부 주도의 가족계획 정책 하에 불임수술 할당에 따라 수많은 장애인들이 강제 불임수술을 당해야 했고, 한센인들은 90년대까지도 국가에 의해 강제 단종수술을 당했다.(*) 이러한 모순이 지금까지 ‘태아의 생명권’을 내세워 실제로는 여성의 몸을 통제함으로써 인구와 노동력을 관리해 온 국가정책의 근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모순된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낙태 처벌을 둘러싼 논쟁은 주로 임신과 출산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으며, 사회적 통제에 대응하여 자신과 태아의 삶을 고려하는 여성 스스로의 자율적 ‘결정권’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임신과 출산이 하나의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여성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조건, 몸, 건강, 관계, 섹슈얼리티 전반에 연계되어 있는 중요한 삶의 과정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전반의 문제들을 함께 다루기가 어렵다. 둘째, 비장애인 성인 여성을 기준으로 ‘단일한 여성 집단’을 가정하게 됨으로써 다양한 상황과 조건에 있는 여성들의 구체 맥락을 고려하기가 어렵다. 즉, 교육수준/지역 여건/국적/언어 등의 문제로 정보 접근에 취약한 조건의 여성, 경제적으로 취약한 조건의 여성, 의료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취약한 조건의 여성, 청소년, 미혼모, 장애여성, 성소수자 여성 등이 처한 조건들이 구체적인 각각의 맥락으로서 고려되지 못하고 단지 '아이를 기르기 어려운 조건'으로서만 뭉뚱그려 간주되는 것이다. 일례로 장애여성의 경험이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재생산'에 대한 요구나 몸의 차별적 위치 등에 대해서는 함께 맥락화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개입하는 재생산 기술이나 자본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함께 고려하기도 어렵게 된다. 따라서 이제는 이런 전반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접근하고 요구하기 위해 '여성의 결정권'이나 ‘재생산 권리’ 차원을 넘어 '재생산 정의'의 관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재생산 권리'와 '재생산 정의'

'재생산 정의'의 개념은 인종, 언어,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경제적 상황, 법적 조건, 감금 상태, 장애, 질환 등 여성들이 사회에서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성적 권리와 건강권, 임신/출산 및 양육에 관한 권리 기반을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출처: rhrealitycheck.org / 설명: 필자)

▲ '재생산 정의'의 개념은 인종, 언어,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경제적 상황, 법적 조건, 감금 상태, 장애, 질환 등 여성들이 사회에서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성적 권리와 건강권, 임신/출산 및 양육에 관한 권리 기반을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출처: rhrealitycheck.org / 설명: 필자)

‘재생산 권리’라는 개념은 1994년 카이로 회의에서 처음으로 공식 채택되어 1995년 북경세계여성대회에서 '인권'으로서 그 구체적 내용을 확장했다. 재생산 권리의 개념은 임신/출산의 여부, 시기, 빈도 등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리뿐만 아니라 보건서비스에 접근할 권리, 안전하고/효과적이고/입수 가능하고/수용할 수 있는 가족계획에 대한 정보 및 서비스에 접근할 권리를 포함하며, 나아가 만족스럽고 안전한 성생활을 영위할 권리까지 포함한다. 또한 재생산 권리는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안녕 상태에 도달할 권리'로서의 '재생산 건강권'을 중요한 요건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재생산 권리가 포괄하는 중요한 요건들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은 애초에 자신의 삶의 조건상 권리에 대한 접근권이나 선택권 자체를 가지기가 어려운 여성들의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때문에 1980년대 후반 미국의 선주민 여성들과 비백인 여성 단체들을 중심으로 '재생산 정의'라는 개념이 제안되었다. 이 개념은 재생산 건강과 재생산 권리에 더해 이를 확보하기 위한 여성들의 역량 강화, 그리고 이를 위한 사회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를 드러내고 변화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삶에서 다양한 맥락과 조건 하에 몸과 건강, 성교육, 성관계, 피임, 임신, 출산, 섹슈얼리티의 표현과 실천 등을 제한받거나 통제당하는 여성들의 경험을 교차적으로 분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요구들을 구체화한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존재'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점을 전환하여 재생산 권리를 누구나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책임과 역할을 사회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요구를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요구와도 교차하여 보다 구체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여성의 재생산 정의를 위한 요구는 단지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조건이나 출산 여부로서만 다루어지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조건과 섹슈얼리티 전반을 고려하게 하며, 장애나 질병을 가진 이들의 사회적 존재와 조건, 이를 둘러싼 가치 자체를 새롭게 전환하여 볼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재생산 정의 운동을 하는 단체 중의 하나인 '재생산 정의를 위한 아시아 커뮤니티'는 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가로막고, 재생산에 대한 압력을 가하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 "재생산 통제와 여성의 몸과 노동의 착취는 모두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연령, 이주상태에 기반한 사회적 억압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고 분석했다.(**) 이는 재생산 통제가 단지 인구 통제로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 영역에 걸친 구조적 통제를 위해 활용된다는 지점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재생산 정의’ 개념의 이러한 접근과 관점은 낙태 논의에 대한 접근 방식을 전환시켜줄 뿐만 아니라, 장애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소수집단 또는 차별적 위치에 있는 집단의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과 요구를 드러낼 수 있는 담론적 기반을 만들어주고, 성적 권리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율적인 접근, 성교육, 피임, 임신, 출산, 의료시스템, 정보 접근권 등 재생산 권리에 관련된 요구들을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보다 구체화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재생산을 여성들의 임신/출산에 관한 문제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재생산을 통한 사회 통제의 관점에서 다룰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국에 거주하는 라틴계 여성들의 재생산 정의를 요구하는 단체 'National Latina Institute for Reproductive Health'의 그림. 인종과 국적,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연령 등 다양한 조건들의 교차 속에서 라틴계 여성들이 처하게 되는 구금, 추방, 피임이나 낙태의 통제, 의료 서비스에서의 접근성 문제, 폭력, 차별, 경제적 불평등, 인종차별, 시민권과 인권의 부정 등 다양한 문제들을 '재생산 정의'로서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latinainstitute.org / 설명: 필자)

▲ 미국에 거주하는 라틴계 여성들의 재생산 정의를 요구하는 단체 'National Latina Institute for Reproductive Health'의 그림. 인종과 국적,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연령 등 다양한 조건들의 교차 속에서 라틴계 여성들이 처하게 되는 구금, 추방, 피임이나 낙태의 통제, 의료 서비스에서의 접근성 문제, 폭력, 차별, 경제적 불평등, 인종차별, 시민권과 인권의 부정 등 다양한 문제들을 '재생산 정의'로서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latinainstitute.org / 설명: 필자)


‘재생산’ 다시보기

한편으로 지금까지 ‘재생산 권리’, ‘재생산 정의’라는 개념이 임신, 출산을 둘러싼 권리를 구체화하는데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나아가 ‘재생산’에 대한 관점 자체를 다시 고민해볼 필요도 있다. 사실 임신, 출산을 통한 인간의 재생산은 재생산 영역의 아주 일부일 뿐이며, 재생산이라는 개념은 마치 생산에 종속되거나 부차적인 영역인 것처럼 고려되어 왔기 때문이다.
생산에 종속된 위치로서의 재생산은 생산을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인간 재생산에 있어서도 이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특정한 기준의 '정상성'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정상성의 기준에 맞는 아이를 재생산하도록 역할을 부여받는 여성들에게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하는 일, 특정 연령마다 요구되는 발달단계와 일정한 지능, 학업 성취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큰 죄책감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일이 되고 만다. 또한, 우리 모두는 그러한 정상성을 잘 유지하는 존재로 계속 스스로를 재생산해야 한다. 이 역할을 하느냐 마느냐, 얼마나 훌륭한 재생산을 해냈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가치 위계가 달라진다. 그러나 사회는 이처럼 사실상 재생산 전반을 관리, 통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은 공적 영역, 재생산은 사적 영역으로 분리하여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한다.
갈수록 발달하는 의료기술, 특히 재생산 기술은 이러한 지점들을 파고들어 우리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관리와 자율성을 점점 더 빼앗아가고 있다. 에코 페미니스트인 그레타 가드는 <재생산 기술, 아니면 재생산 정의? : 선택의 수사에 대한 에코 페미니스트, 환경정의의 관점>이라는 글(***)에서 새로운 재생산 기술에 대한 선택의 수사가 얼마나 반 페미니스트적인지에 대해 주장한다. 이러한 기술이 불임률의 증가를 여성들의 선택의 문제로 전가하고, 건강에 미치는 나쁜 영향을 숨기면서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여성들에게 난자 기증이나 대리모 노동을 수행하도록 유인한다고 비난한다. 또한, 여성들을 자기 몸의 생식력으로부터 분리해내어 자궁을 과학적이고 경제적으로 개입 가능한 장소, 상품화에 열려진 자연적 '자원'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여성들의 '선택'의 문제로 취급함으로써 이를 개인화하고 의료화하거나 탈정치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기획단 활동을 통해 장애여성들의 생생한 경험들을 접하면서 이러한 재생산 기술, 생식기술의 문제를 앞으로 더욱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장애여성들에게 이는 매우 실질적인 문제로, '정상적인 재생산'을 위한 사회적 요구가 장애여성들의 몸에 대한 기술 개입으로 당연시되면서도 이에 대한 장애여성들의 고민은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만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러한 고민들을 나누며 '좋은 삶'과 '건강한 몸', '정상성'에 대한 가치 기준을 바꾸고, 생산과 재생산에 대한 패러다임을 전환해나가는 논의로까지 함께 확장해갈 수 있기를 바란다.

(*) 나영정, ‘젠더, 장애 교차적 관점에서 재생산 권리를 논의하기’,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연속포럼 4차> 자료집, 2015.10.7

(**) https://en.wikipedia.org/wiki/Reproductive_justice

(***) Greta Gaard, ‘Reproductive Technology, or Reproductive Justice?: An Ecofeminist,Environmental Justice Perspective on the Rhetoric of Choice’, <Ethics & the Environment> Volume 15, Number 2, Fall 2010, pp. 103-129(Article) Published by Indiana University PressDOI: 10.1353/een.2010.0056


이 글은 2015년 10월 22일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종합토론>에서 발제했던 글로 ‘불평등과 성적 권리로 관점을 전환하는 여성주의적 재생산 정의 운동’을 바탕으로 수정, 작성한 것이다.
덧붙임

나영 님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GP 네트워크 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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