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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내가 사는 그집

[내가 사는 그집]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네..

벌칙은 TV다. 지난 몇 년간 병역거부를 고민하며 수감생활의 두려움을 상상했을 때 난 TV가 나의 가장 큰 고통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뭔가 거창하고 도덕적인 느낌을 주는 행위, 그리고 ‘수감생활’이라는 뭔가 외롭고 어두운 시련의 느낌을 주는 그 대가는 이미지와는 달리 하루 종일 신경을 긁는 시끌벅적한 TV소리와 수다소리라는 실상으로 내게 괴로움을 준다. 하루 6~7시간씩, 채널 선택권은 없이 예능과 드라마를 쏟아내는 저 TV가 나를 교화시킨다니 믿을 수가 없다. 교화라는 단어의 뜻을 내가 잘 못 이해한 건가. 유일한 생방송인 뉴스에서는 정치인이나 재벌들이 법망을 피해가는 걸 보여준다. 우리 ‘죄수’들은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죄’때문이 아니라, 혹은 이익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권력없음’ 때문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이것이 이곳의 교화다. 그날 그날 바뀌는 기상캐스터의 스타일과 치마길이는 이곳의 ‘안구정화’다

여기 와서 “진짜 사나이”를 처음 봤다. 내게는 진지한 고민의 대상이었던 군대가 여기선 예능이다. TV속의 저 연출된 힘듦은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소비되고 어떤이에게 추억으로 기능한다. 우리 방에 있는 아저씨들은 연예인들의 엄살과 여자연예인의 어설픔을 조롱하며 나약한 요즘 애들과 개념없는 여자들에 대한 우월감에 기뻐한다.

임병장과 윤일병 사건이 TV에 나올 때 그들은 언성을 높인다. 요새 애들은 약해 빠져서 북한군이 오면 다 도망갈 거라고, 저 정도 폭력이 없으면 그게 군대냐고, 우리때는 더 심했다고. 이러한 ‘아빠’들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엄마’들이 승리하는 듯하다. 요즘 시대에 군인은 더 이상 국가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가족과 개인의 소중한 자산이자 미래인 것이다.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연일 나라가 들썩이자 아저씨들은 나를 의식한다. 넌 저걸 어떻게 생각하나고, 토론을 원하는 게 아니라 시비를 건다고 느껴질 때 난 편리한 회피를 한다. "아 제 생각에 임병장과 윤일병 사건은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사회적 흐름 속에 국가를 위한 희생을 당연시 하던 관점에서 이익과 자기계발의 차원으로, 즉 낡은 보수적 군사주의에서 신군사주의1)로의 전환기에 기존의 군사주의가 한계점을 노출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문용어는 때론 원치 않는 소통을 끊는데 유용하다. 토론은 싸늘하게 종결된다.

‘너한테 손해야’ 병역거부를 고민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다. 많은 이들은 나에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강조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익과 손해의 문제였다. 하기사 우리는 총과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가진 군사 정권이 아니라 트위터와 인터넷 덧글로 통치하는 선출된 정권에서 살고 있다. 군대가 ‘예능’이 된, 경력을 위한 체험이 된 우스운 시대에 군대를 거부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 아니라 손해 보는 일이다. 감옥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이익과 손해의 대차대조표를 따져보며 삶의 불안과 병역거부의 의미를 견줘보던 나도 여지없이 ‘신군사주의’의 공모자가 아닌가.

어쨌든, 어차피 이곳에 들어온 거 나도 자기계발 좀 해보려고 했다. 그동안 소홀하게 버려둔 영어도 좀 보고, 밀렸던 책들도 읽고 피부미용과 건강에도 신경써보려 했다. 그게 무언가 수감생활이라는 억울함과 개인적 차원에서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말의 위안이었다. 뭐라도 얻어가자!
[사진 출처] 법무부

▲ [사진 출처] 법무부


그런데 TV가 문제였다. 하루 종일 시끄러운 TV는 쉬지 않고 음악과 말과 웃음소리를 쏟아낸다. TV가 있는 한 소음의 공백은 없다. 내가 과민한 것 일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지난 15년간 내 공간에 TV를 놓지 않고 살았다. TV를 싫어하는 내 감정 때문인지 TV소리에 점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내 잘 자던 잠을 못자기 시작했고 건강하던 몸도 생기를 잃었다. 상담을 해줬던 계장님은 나에게 참으라고 했지만 사실 자신도 애들 교육 때문에 집에선 TV를 켜지 않는다고 했다. 교육과 교화는 다른 것인가? 추석연휴를 앞두고 결국 난 TV를 거부했고, ‘벌칙’으로 TV가 제한된 독방에서 연휴를 보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에서도 간만의 평화를 만끽하는데 옆방에선 TV를 못 보게 한다고 거칠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린다. 재밌는 일이다. 나의 적인 TV가 누구에겐 기본권이라니.

1)‘신군사주의’라는 용어는 『창작과 비평』가을호에 실린 김엘리님의 글 「불확실한 삶에서 움트는 신군사주의」에서 참고했습니다. 글속의 대화는 비슷한 취지를 했던 말을 추후에 각색한 것입니다.
덧붙임

본명은 성민, 이리저리 활동하고 살고 여행하다 2013년 11월 18일 입영을 거부하고 병역거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