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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장애여성운동 15년, 제도화를 경계하며 운동하기

장애여성운동의 등장, 15년의 시간들

한국에서 장애여성 단체들이 생겨나고 장애여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1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장애인운동도 여성운동 아닌, 하지만 장애와 성별이 교차하는, 장애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탐구하며 독자적인 운동의 출발점을 갖게 된 장애여성운동은 새로운 관점과 해석, 운동의 담론과 방식을 도전하고 실천해 왔다. 해외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장애여성 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한 2013년 한국사회에서 장애여성운동을 어떤 관점과 원칙, 언어를 가지고 평가해야할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15년이 지난 지금 과연 ‘장애여성 단체=장애여성운동 단체일까’ 라는 거친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기도 한다.

장애여성운동사 전시회 <사진제공: 장애여성공감>

▲ 장애여성운동사 전시회 <사진제공: 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운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운동과 여성운동의 복잡한 지형과 넓은 스펙트럼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장애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모호하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장애인/여성이라는 정체성도 중요하지만, 운동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집단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운동을 한다고 할 때, 단순히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그칠 것인가 혹은 사회의 정의, 평등을 지향하느냐가 운동의 성격을 말해준다. 후자를 지향할 때 운동을 운동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여성운동의 고민과 실천은 현장에서 어떻게 세분화되고 심화되었을까? 장애여성운동 초기부터 집중했던 ‘몸’담론은 여성주의와 만남의 거점으로, 성소수자와의 연대의 매개로써 다양한 몸에 주목하며, 사회의 정상성 규범을 문제제기 해왔다. 한편 장애인 운동 안에서는 ‘몸’담론 자체가 과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과 함께 장애의 정의와 범주를 고민하면서 손상과 질병이 있는 몸에 대한 고민을 불러왔다. 그리고 최근 장애여성공감은 다양한 현장에서 발달장애여성과의 만남이 본격화되면서 몸의 차이와 관련된 담론과 주장이 그 동안 신체적인 차이로만 상상, 경험되어온 인식에 도전하고 있다.

장애여성운동사 전시회 <사진제공: 장애여성공감>

▲ 장애여성운동사 전시회 <사진제공: 장애여성공감>


섹슈얼리티 담론은 장애여성운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데 늘 갈등적인 상황에 우리를 놓이게 한다. 중증장애여성, 지적장애여성이 성폭력 사건의 피해를 당했을 때 효과적으로 법적 구제를 받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저항이 불가능한 몸’이라는 점을 드러내거나 강조해야 하는 상황을 맞닿드리게 된다. 하지만 성폭력에 취약한 몸, 절대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몸을 강조하면 반성폭력운동의 목표인 성적자기결정권 확보의 노력을 제대로 해나가기 어렵다. 결국 장애여성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탐색하고 표현할 수 있는 기회보다는 사회 속에서 폭력의 피해자로만 각인되거나 통제 당하는 상황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장애여성독립생활운동은 한국의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의 변화와 성장과 함께하면서도 외로운 고민과 싸움이 오늘도 진행 중이다. 독립의 주요한 이슈인 주거권과 관련해서는 주거 공간에서 장애여성의 공간 선택권과 주도권, 안전과 폭력 피해의 문제를 이야기 해왔고, 동료상담 영역에서는 과연 장애 정체성만으로 ‘동료’가 될 수 있는지를 질문했다. 이런 과정은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가 ‘단지 장애여성만을 지원하는 곳’이라는 편견에, 젠더관점으로 독립을 재구성하며 끊임없는 토론과 그에 상응하는 실천으로 대답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제도 확보를 위한 투쟁 그리고 제도화를 경계하며 거리두기

그렇다면 장애여성 관련 정책은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을까? 1990년대 후반까지 장애여성정책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최근 장애여성 관련 지원체계와 제도가 조금씩 만들어졌고, 이제는 정책의 대상자로 고려되는 면이 있다. 이는 독자적인 운동을 시작했던 장애여성운동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여성운동과 장애인운동이 제도화되면서 함께 변화된 흐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애여성관련 정책의 대부분의 모성권 담론 혹은 여성으로서 부여되는 가사노동, 양육과 같은 성역할에 한정된 것이 여전히 주류를 차지한다.

장애여성활동가 워크숍 <사진제공: 장애여성공감>

▲ 장애여성활동가 워크숍 <사진제공: 장애여성공감>


여성과 장애인이 경험하는 차별을 없애고 권리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여성운동, 장애인운동이 싸워온 기나긴 과정은 분명 장애여성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운동, 장애인운동에서 많은 제도와 법을 새로 만들거나 바꿔왔던 것은 가시적인 성과이면서 동시에 운동적 과제와 갈등을 많이 안겨주고 있다. 운동을 하는 단체가 정부 보조금을 받는 것은 물리적 기반의 안정성을 확보하지만 정부의 통제와 요구사항과 끊임없이 싸우고 협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체가 서비스 전달체계를 운영하는 것, 정부 예산으로 기금 사업이 마련되는 것, 정부나 지자체에 책임을 묻고 요구할 수 있는 담당 부처가 있고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이 있는 것 등등이 모두 운동의 제도화와 연결되어 있다.

장애인자립생활운동 안에서는 최근 동료상담가 자격증이나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운영기준 같이 예산을 지원 받기 위한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때 그 ‘기준’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자격이 있는 자’와 ‘자격이 없는 자’는 곧 제도권 안에 포섭이 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해내는 과정이 아닐까? 이런 상황이 계속될수록 사회적 자원획득이 어려워 자격을 획득하기 어려운 장애인은 다시 제도와 지원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서비스 전달체계로써의 역할은 운동성을 지켜나게 어렵게 만들고 더구나 성과중심의 제도화는 사회적으로 자원이 없는 중증장애인이 운동단체에서 주체로써 함께 하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운동이 제도화되면서 장애여성의 삶도 제도화되어 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장애여성공감은 최근에 많이 하고 있다. 최근에 장애여성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다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장애여성 참여자가 활동가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프로그램 제공/기획자 대 참여자’라는 도식이 쉽게 굳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다. 그동안 장애여성 관련 제도가 너무 없었기 때문에 제도와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제도화 자체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여성운동에서 제도화에 대해 긴장감을 가지고 투쟁해왔던 경험은 장애인운동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하지만 장애인등록을 하고 지원을 받기 위해 국가의 행정에, 사회복지서비스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장애인들의 삶은 제도와 거리를 두고 긴장지점을 만드는 것에 더 어려움이 있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진 제도들(이를테면 장애인 활동보조인 지원제도 등)경험한 세대와 그 지원을 비교적 늦게 받은 세대 등 세대적인 경험에도 차이가 있다. 활동보조 제도가 장애인의 삶에 꼭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많은 장애인들이 활동보조가 제도화되기 전에 ‘활동보조인이 없는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다. 제도와 법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싸워온 세대와 이미 만들어진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익숙해진 세대의 경험과 주체성은 다르지 않을까? 이러한 제도화와 관련한 문제의식이 장애여성운동 안에서도 시작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과연 우리가 만들고 싶은 권리확보를 위한 제도와 인간다운 삶 사이에는 어떤 간극과 틈이 존재하는 것인지 여전히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장애여성 취약계층이란 도식이 주는 불편함과 경계

한편으로는 많은 제도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각각의 제도가 어떤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도 살펴봐야 한다. 장애여성 관련 제도들은 장애여성이 ‘취약 계층’이라는 것을 더 공고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장애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언어는 ‘취약계층, 사회적 약자, 더 많은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집단,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 장애여성으로서의 이중고, 열악함...’ 등등이다. 이런 언어들이 운동의 초기에 장애여성이 경험하는 문제를 알려내는 것에 전략적으로 필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언어가 지금은 너무 보편화되고 장애여성을 규정하는 말이 되었으며 사회적인 제도도 이런 틀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서 무능력과 비정상성을 강조하는 전략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전략은 언제나 좋은 전략일 수 없다.

15년 전의 다짐, 정상성에 도전하며 연대의 손을 놓지 않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경험에 귀 기울이고 억압과 차별을 넘어서 장애와 다양성과 차이의 세계를 탐험해 가면서 우리가 가진 조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여성들과 나누고 힘과 자신감을 가져나갈 것이다.” 장애여성잡지 [공감] 1호 (1998년)

장애여성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기존 여성운동 안에서 장애여성의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 장애인운동 안에서 젠더적 관점이 없으며 장애여성 이슈를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많이 해왔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장애여성운동의 독자성은 장애인운동과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에서 구성된 부분이 많다. 그리고 그만큼 장애여성운동은 장애인운동, 여성운동, 소수자 운동과 함께하면서 장애여성의 경험을 나누려고 해왔고, 우리의 인식과 운동의 지평을 넓히고 연대하며 실천하고자 노력해 왔다. 이것은 앞으로도 놓지 말아야할 가치일 것이다.

그리고 15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흘렀다면 이제는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문제제기와 비판, 정체성운동을 넘어서 15년 동안 장애여성운동을 한 책임감으로, 건강권, 노동권, 교육권, 재생산권, 발달장애 등 새롭게 재구성하고 대안을 만들고 실천해야할 과제들이 장애여성운동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