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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농민권리선언(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 2012)

밀양 할머니들의 몸의 시간을 무시하지 마라

할머니, 특히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부러움을 받을 때가 많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할머니란 한없이 감싸주고 돌봐주고 덮어주시던 손길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런 할머니가 계셨으니 참 복 받은 일이라 여긴다. 돌아가신 지 10여년이 지났는데 오늘따라 할머니가 유독 그립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키워주셨다. 갓 태어난 동생이 중병을 앓아 병수발을 해야 했던 부모님이 시골 할머니께 날 맡겼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몸은 참 자그마했다. 그런데 일은 태산처럼 하셨다. 난 종일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할머니는 늘 바쁘게 종종거리셔야 했다. 뙤약볕에서 온종일 밭일을 하셨다. 그 옆에서 나는 심심하다고 집에 가자며 울어 제켰다. 그러다 지쳐 내가 잠들어버리면 할머닌 해질녘이 돼서야 날 업고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집엔 더 나이든 할머니(할머니의 시어머니)가 계셨는데, 요강을 비워드리고도 그 주변을 한참 치워야 했다. 그리고 나선 부엌에서 군불을 때고 가마솥 옆에 앉아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드셨다. 밤에도 콩깍지를 까거나 썩은 콩을 골라내며 늦게까지 주무시지 않았다. 나이 들어 농사를 접고 서울 생활을 하게 되신 것은 형편 어려운 자식들 집마다 돌아다니며 살림을 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날 보실 때마다 속바지 속에 꼬깃꼬깃 접어둔 지폐를 꺼내 주시며, 꼭 책 사는 데만 쓰라고 하셨다. 용돈을 모으고 또 모으셨을 그 돈에선 비릿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의 주름살은 웃음꽃으로 핀 명품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단 한번 우시는 것을 봤다. 우리 집이 진 빚을 갚지 않는다고 삼촌들이 쳐들어와 싸움이 난 밤이었다. 돈 때문에 벌어진 자식들의 쌈박질 앞에서 할머니는 가슴을 치며 우셨다. 할머니의 주름살이 시커먼 개천 물처럼 변했다. 그런 할머니를 따라 나도 울었다.

오늘 내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 또 다른 할머니들 생각에 울컥하다. 평생의 노동이 구부러뜨린 허리, 숱한 웃음과 눈물 속에 패인 주름살, 거칠지만 따뜻한 손, 지팡이를 짚은 무너진 무릎, 여러 자식 기르느라 축 쳐진 가슴……. 감싸주고 돌봐주고 덮어준 세월이 묻은 몸. 내 할머니와 다르지 않은 밀양의 할머니들 모습이다. 그분들은 그렇게 긴 세월이 새겨진 몸으로, 땅과 숲과 직접 맞닥뜨려온 삶으로 그 몸과 관계를 무시하는 폭력에 맞서고 있다.

핵 발전이 편리하고 싸다는 말, 송전탑을 세우면 보상 많이 해주겠다는 말, 뭘 모르는 촌로들이 세뇌됐다는 말, 그런 말들을 결코 믿을 수가 없다. 그런 말들 속에는 몸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몸이 겪어온 시간, 할머니들이 자연과 같이 살아온 시간이 그런 말속에는 없다. 시퍼런 삽날로 베어버리고 차가운 탑을 밀어 넣으며 돈 얘기만 하는 쪽에는 그 말을 책임질 ‘몸’이 없다. 그러하기에 지나온 사건에 대한 반성도 없고 미래 세대가 떠맡아야 할 위험에 대한 고려도 없다.

할머니들이 폭력에 짓밟히는 같은 시간, 도시에선 쫓겨난 노동자들이 밤을 지새웠다. 엊그제 있었던 일이다. 골든브릿지 증권 파업농성장에 연대하는 뜻으로 여기저기서 보내온 현수막을 사측이 무단으로 떼버렸다. 노동자들이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횡설수설 발뺌을 하거나 ‘거지같은 것들’이란 식으로 모욕을 줬다. 노동자들은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돌려줄 때까지 못 움직이겠다고 버텼다. 환기가 안 되는 복도엔 땀내와 고린내가 가득 찼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갑자기 옆자리 노동자가 흥분하며 핸드폰을 보여줬다. 밀양 할머니들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내용을 반복하는 인터넷 글이었다. 구체적 몸이 없는 말은 그렇게 영혼을 살해하는 무기가 되는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본인의 영혼을 살해하는 무기 말이다.

일 때문에 중간에 그곳을 떠난 나에게 아침 10시경 전화가 걸려왔다. 현수막을 되찾았다고 흥분한 노동자의 목소리였다. ‘징하고’도 ‘장한’ 일이었다. 현수막 하나 되돌려 받느라 복도 바닥에서 온 밤을 보내야 하니 노동자들의 몸뚱아리 정치는 참 힘들고 고되다. 평생 살아온 땅과 숲을 지키기 위해 옷을 벗고 목에 밧줄을 걸어야 하는 할머니들의 몸이 너무 아프다. 그렇게 여기서나 저기서나 숱한 사람들의 정직한 시간이 조롱받고 있다. 단어 한 개 한 개 외워 외국어를 배우듯 인내를 모아야 하는 몸의 정치가 무시되고 있다. 선거 때만 반짝이는 사탕발림이 아니라 길거리 잠을 자고 포클레인에 맞서는 숱한 몸들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몸의 시간, 몸의 정치 없이 쉽게 변화를 얘기하는 입을 믿지 않는다.

지금(5월 29일-6월 7일) 유엔 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마가렛 세카시야)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밀양의 할머니들과 울산 송전탑의 노동자들도 만난다고 한다. 인권을 위해 싸우는 인권옹호자들에게 자행되는 보복의 규모와 정도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유엔은 인권옹호자선언을 채택하고 특별보고관도 임명했다. 특별보고관은 인권옹호자 탄압에 대한 청원을 접수하고 조사‧권고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특별보고관이 사안을 다룰 때 인권옹호자의 주장이 법적으로 옳고 그르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권옹호자란 그들이 옹호하는 권리가 무엇이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인권옹호자들 자신이 갖는 권리에 따라 정의되고 수용돼야 한다는 것이 유엔이 정한 원칙이다. 정부나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자세한 내용은 인권오름 제 87호 인권옹호자 선언 참조) 이에 밀양 할머니들이 갖는 권리는 무엇이며, 어떤 권리를 짓밟히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농민의 권리 선언

▲ 농민의 권리 선언


세계적으로 인권옹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형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농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농민인권선언’이다. 할머니들을 여러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농민은 그중 중요한 이름일 것이다. 이 선언의 정의처럼 할머니들은 “땅의 여성으로서, 땅과 자연에 직접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2008년 세계적인 소농 원주민 운동 조직인 ‘비아 캄페시나’(농민의 길, La Via Campesina)가 기초한 것이다. 선언은 세계식량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농촌 소농의 삶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고 있다. 비아 캄페시나는 69개국 148개 조직이 함께 만든 이 선언을 유엔에 제출했고, 2012년 2월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가 그것을 채택했다. 그 후 이 선언을 모델로 해서 유엔인권이사회는 정식으로 농민에 관한 국제인권법을 만들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현재 실무그룹이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선언의 정식 이름은 ‘농민과 농촌지역에서 일하는 여타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선언’(Declaration on the rights of peasants and other people working in rural areas)이다. 기존 국제인권법이 보장하고 있으나 농민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차별했던 권리들을 재확인하는 한편, 그간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권리, 가령 농민의 땅에 대한 권리나 종자에 대한 권리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선언의 몇 구절에 밀양 할머니들을 넣어서 읽어 본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할머니들의 앎에 따라 환경을 보존할 권리가 있고, 환경 파괴를 일으킬 모든 형태의 착취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할머니에게는 밀양의 농업 가치를 파괴할 수 있는 개입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할머니의 숭고함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농민인권선언(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 2012년 2월)

제 1조 농민의 정의

1. 농민은 땅의 남녀로서, 식량 생산 또는 여타의 농업 생산물을 통해 땅과 자연에 직접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다. 농민은 땅에서 직접 일하며 무엇보다도 가족노동과 여타의 소규모 형태로 조직된 노동에 의존한다. 농민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지역 공동체에 뿌리박고 현지의 지형과 농업-생태 시스템을 돌본다.
2. 농민이란 용어는 농사, 소 사육, 목축, 농사와 관련된 수공업 또는 농촌 지역에서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여기에는 땅에서 일하는 원주민이 포함된다.
3. 농민이란 용어는 또한 땅 없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범주의 사람들이 무토지자로 간주되며 생계 보장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1. 땅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농업 노동 가구, 2. 농사를 짓지 않는 농촌 지역 가구, 땅이 없으며 가족 구성원이 낚시, 현지 시장에 낼 수공업품 제작, 서비스 제공 등의 다양한 활동에 종사, 3. 목축, 유목, 화전 농작, 사냥, 수집을 하는 기타 농촌가구, 그리고 유사한 생계활동을 하는 사람들

제 2조 농민의 권리
1. 모든 농민,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2. 농민은 유엔 헌장, 세계인권선언, 그리고 여타의 국제인권법에 인정된 모든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완전히 누릴 권리를 갖는다.
3. 농민은 자유롭고 모든 여타 사람들과 동등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차별로부터도 자유로울 권리, 특히 농민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지위로 인한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갖는다.
4. 농민은 자신들의 땅과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프로젝트, 프로그램 또는 정책에 대해서도 정책 구상, 의사결정, 이행과 모니터링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5. 농민은 식량 안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것은 생태적으로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을 통해 생산되는 건강하고 문화적으로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농민 스스로 식량과 농업 시스템을 정할 권리로 구성된다.

제 9조 농업의 가치를 보호할 권리
1. 농민에게는 농민의 문화와 현지의 농업 가치를 인정받고 보호 받을 권리가 있다.
2. 농민에게는 농업에서 현지 지식을 발전시키고 보존할 권리가 있다.
3. 농민에게는 현지의 농업 가치를 파괴할 수 있는 개입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4. 농민에게는 농민의 숭고함을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표현할 권리가 있다.

제 11조 환경을 보존할 권리
1. 농민에게는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 대한 권리가 있다.
2. 농민은 자신들의 지식에 따라 환경을 보존할 권리가 있다.
3. 농민은 환경 파괴를 일으킬 모든 형태의 착취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4. 농민은 환경 파괴에 대해 소송하고 보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5. 농민은 생태적 부채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의 땅과 지역에 대한 역사적이며 현재적인 처분에 대해 배상받을 권리가 있다.

제 12조 결사, 의견, 표현의 자유
1. 농민은 타인과 결사할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현지와 지역‧전국‧국제적 차원에서 이의 제기‧청원‧동원을 포함하여, 전통과 문화에 따라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2. 농민은 자신들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하여 독립적인 농민 조직, 노동조합, 협동조합 또는 기타 형태의 조직이나 결사를 형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갖는다.
3. 농민은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현지의 관습‧언어‧문화‧종교‧문화적 문헌‧지역 예술로 표현할 권리를 갖는다.
4. 농민은 자신들의 권리요구와 투쟁이 범죄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5. 농민은 억압에 저항할 권리와 자신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평화적인 직접 행동에 호소할 권리를 갖는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