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 언니네 방앗간

[언니네 방앗간] 성폭력 사건에 합의하면 ‘꽃뱀’?

지난 달 20일, 고영욱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 고영욱과 합의를 한 사실이 보도됐다. 고영욱 사건의 피해자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대중들은 피해자의 성향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면서도 고영욱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거세게 퍼부었다. 하지만 합의 사실이 보도되자 일부 네티즌들은 해당 피해자를 ‘가여운 피해자’에서 ‘꽃뱀’으로 둔갑시켜버렸다.

한 유명 포털 사이트의 베스트 1,2,3위에는 모두 피해자를 ‘꽃뱀’이라 비난하는 댓글이 달렸고, 다른 유명 포털 사이트들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무혐의 처리되었던 주병진 강간치상 사건을 언급하며 어린 ‘꽃뱀’이 연예인의 유명세를 약점으로 삼아 돈을 뜯어내려고 한 게 아니냐는 내용들이었다.

‘꽃뱀의 음모’, ‘정치적 음모(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기 위해 정부가 터트렸다는 내용)’ 등등의 내용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정작 비판의 중요한 근거가 되어야 할 ‘사실 확인’은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사건이 어떤 상황에서 이뤄졌고, 합의를 하는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 간의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고려는 그 안에 없었다. 그저 성폭력을 돈으로 합의처리하면 ‘폭력’이 ‘매매’가 되어 버리는 상황을 보여줄 뿐이었다.

사실 이러한 정황은 비단 고영욱 사건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유명인 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물질적 피해보상을 받고 합의하려하면 불편한 시선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일반 폭력 사건을 대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고소했을 경우, 피해 상황을 반복적으로 기억·증언하고, (상황에 따라) 재판 과정 중에 계속되는 가해자와 대면해야 하고, ‘여성성이 훼손’됐다는 주변의 시선과 자기모멸감에 몇 달 혹은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지리멸렬한 싸움을 지속해서라도 돈을 받지 않고 상황을 진행시켜 그 ‘순수한 의도’를 내비춰야 한다. 하지만 성폭력범의 형량은 그 피해의 심각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이 중론이다.

가부장제 남성중심 사회에서 ‘성폭력’은 여성을 통제하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어져 왔다. 민주주의가 탄생하고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어가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여전히 ‘성폭력’은 사회 안에서 여성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 안에서 성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바른 인식을 정착시키고, 그 심각성에 비례한 처벌을 내린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관련 정책 내용은 끓어오르는 여론을 잠시 진정시키기 위한 주먹구구식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중들도 심각한 성폭력 사건에 요동쳤다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논의에 접근하기보다 점차 문제를 덮어두는 쪽을 택해왔다.

고영욱 사건에서 피해자가 합의했다고 보도되자 일부 네티즌들이 피해자를 ‘꽃뱀’이라고 지칭하는 모습들은 성폭력의 심각성과 무게감을 일반 폭력 사건에 비해 낮게 위치 짓고 있는 사회적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폭력 사실과 관련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접어두고, (마치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 ‘꽃뱀 응징’에 혈안이 돼 있는 일부 네티즌들의 모습을 보면 말이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 없이 피해자를 쉽게 비난하고 있다는 ‘부끄러움’ 따위란 없다. 그런 ‘부끄러워야 할’ 이야기들이 쉽게 떠들어지고 있는 상황이 이 사회에서는 용인되고 있다.

성폭력에 관련한 이러한 폭력적인 분위기가 쉽게 바뀌긴 어려울 것이다. 제도 개선을 통해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꾀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성폭력’을 이야기할 때 사회 각 계층의 상황을 고려한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그러지 못한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세가 시급한 것 같다.
덧붙임

코린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