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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범죄수사드라마가 프라이버시권에 미치는 영향

드라마 속 경찰의 인권불감증이 나에게로 전염되다

'CSI', '크리미널마인드', '멘탈리스트' 등 미국의 수사드라마가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요즘 한국에서도 많은 수사드라마가 제작 방영되고 있다. 나 역시 수사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다. 여러 용의자 중 과연 누가 범인일까, 어떤 반전이 있을까 추측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드라마에 빠져들게 된다. 드라마 속 경찰들은 범죄자를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력을 기울인다.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경찰은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 영웅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수사과정 중 시민들의 인권보호이다. 드라마는 때로 시청자들의 의식변화를 유도한다. 수사드라마를 보다가 경찰의 인권 침해적 수사에 길들여져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문득 드라마의 영향력이 굉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수사드라마가 재밌기도 하면서 동시에 불편하기도 하다.

드라마 속 경찰수사, 법과 원칙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패킷감청, 위치추적 등 수사 방법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유령'에서는 사이버수사대를 배경으로 디지털증거를 이용한 다양한 수사방법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경찰이 추측만으로 통신정보를 수집하고, 통신사 데이터베이스 서버에 침입하여 복제 휴대폰을 만들어 통신감청과 위치추적을 하면서 불법적인 도청, 미행도 서슴없이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수사방법은 세계인권선언 및 국제규범에 명시된 개인의 사적 영역을 보호하는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범인을 잡기 위한 목적이라면 용의자뿐 아니라 범죄혐의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의 기본권 침해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범죄수사과정에서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법원의 통제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며 프라이버시권을 중요한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수사드라마에서는 간혹 수사를 위해 필요한 영장을 발부해주지 않는 판사는 범인을 잡는데 걸림돌이 되는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범죄자를 잡아야 하는 경찰들에게 법과 원칙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다.

강력범죄를 명분으로 한 경찰권한 강화의 위험성

드라마 속 범죄는 연쇄살인, 강간, 강도, 테러 등 강력범죄 사건이 대부분이다.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해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잡기 위해서 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증거 없이 의심만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것도 정당화된다. 경찰은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범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신상을 털고 추궁을 하기도 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수사한다. 그의 무고함이 밝혀지더라도 그 사람에게 행해졌던 기본권 침해는 수사과정 일부로 당연시될 뿐이다. 살인범을 잡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강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경찰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리력과 권한 강화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범죄의 공포감에 휩싸인 시민들에게 강력범을 잡는다는 명분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경찰은 강력범을 잡기 위해서만 과도한 수사방식을 택하고 있지는 않다. 통신비밀보호법에는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경우를 규정하고 있는데 범죄수사의 경우에는 범죄가 특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범죄에 대하여 자료를 요청할 수 있다. 또한, 과도한 수사방식으로 인한 인권침해는 범죄 용의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범죄혐의와 전혀 무관한 일반 시민의 인권침해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예로, 실제 경찰의 수사 방법의 하나로 기지국 수사라는 것이 있다. 기지국 수사는 범죄가 발생하였다고 의심되는 장소를 관할하는 기지국을 이용한 모든 사람들의 통신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수사에 이용하는 방식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기지국 수사는 수사기관이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는 연쇄범죄가 발생하거나, 동일 사건 단서가 여러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발견될 경우, 사건 발생지역 기지국에서 발신된 전화번호를 추적하여 수사를 전개하는 수사기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난해 검찰이 민주통합당 예비경선 현장에서 금품살포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기지국 수사를 이용하여 기자 및 불특정 다수 시민의 통화기록 및 인적사항을 조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연쇄범죄뿐 아니라 다양한 범죄에 기지국 수사가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방송통신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기지국 수사는 수사기관 중 경찰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2010년에는 3,870만 건 이상, 2011년에는 3,680만 건 이상의 전화번호와 이와 관련한 통신 일시, 장소, 상대방 전화번호 등이 수사기관에 의해 수집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이동전화의 70% 이상의 통신사실확인자료가 수사기관에 의해 요청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범죄 혐의 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수사기관에 자신의 정보가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 2011년 6월 16일 무차별적 DNA 채취에 대한 헌법소원 제기 기자회견(출처: 참세상)]

▲ [사진: 2011년 6월 16일 무차별적 DNA 채취에 대한 헌법소원 제기 기자회견(출처: 참세상)]


드라마에서는 무죄추정보다 유죄추정의 법칙?!

수사드라마에서 범죄자를 잡기 위해 지문정보, DNA 정보 등 생체정보를 수사에 활용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수사과정에서 강력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DNA 정보가 필요하다면 제한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경찰이 개별사건 수사를 넘어서서 방대한 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드라마 속에서 DNA 정보는 대부분 성폭력범죄를 저지른 성범죄자 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 경찰은 용산 철거민, 쌍용 노동자, 희망버스 참가자들에 대해서도 DNA 채취와 DNA 데이터베이스 수록을 하고 있으며, 구속피의자에 대한 DNA 채취도 하고 있다. 법원에서는 구속피의자가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죄추정을 받아야 하는데 장래의 범죄수사를 위한 자료 확보를 목적으로 DNA 채취 등 강제수사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한번 수록된 DNA 데이터베이스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며, 이는 사회적인 편견과 낙인을 강화한다. 그러나 수사드라마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눈에 띄는 인물은 모두 범인으로 추정한 뒤에 하나둘씩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는 식으로 수사가 진행되니 등장인물 모두가 범죄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드라마 속 경찰의 인권침해를 경계하라

범죄수사드라마의 무서운 점은 경찰의 수사 방식이 인권 침해적이거나 설사 법을 위반하는 방식이더라도 그것이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인 것 마냥 포장되고 범인을 잡는 데 성공하면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경찰청이 경찰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를 제작 지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드라마 속 영웅적인 경찰의 묘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찰의 권한 확대 필요성과 수사편의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한다.

드라마에서 경찰이 미리 만들어 놓은 함정에 범죄자가 걸려들게 하는 함정수사 장면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진짜 덫에 걸린 것은 우리의 인권감수성은 아닐까 하고.
덧붙임

정민경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