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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의 인권이야기] 다른 양육은 가능할까?

부모. 살아가며 애써 피하지 않는 이상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정체성으로 맞게 될지도 모를 이름이다. 아직까지 내게 부모라는 것은 나를 길러 준 엄마아빠로 존재하는 것이지, 정작 내가 부모가 된다는 건 상상을 잘 못 하겠다. 막연히 아이에 대한 꿈을 키워보긴 한다. 그래도 냉정하게 분리해야겠지. 내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환상과 부모로서 살아갈 녹록치 않을 현실. 양육의 문제 말이다.

최근 새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양육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들의 사연을 지겹도록 읽는다. 다들 아이 기르기가 왜 그렇게 힘든 것인지 사연을 보내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우울해했다. 부모로서의 의무감에 짓눌려 자책하거나 그로 인해 아이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컸다. 그래서 다들 전문적인 방법에 매달리고 싶어 했다. 검증된 양육 방법을 통해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어 했다. 결국은 스스로도 행복해지고 싶은 거다. 이 사회를 살아갈 여타의 부모들도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양육이 마냥 행복할 부모가 얼마나 될까, 이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문제일 텐데 말이다. 얼마나 많이 싸워야 할까. 배우자와 자녀와 그리고 무엇보다 제 자신과의 욕심과. 그 욕심을 만드는 사회의 기준과.

부모는 아이의 사회라고 한다. 그래서 바른 부모됨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겠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절실함과 양육법의 전문성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생각의 끝에 자꾸 밟히는 미진함과 답답함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림: 윤필] <br />

▲ [그림: 윤필]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부모도, 아이도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내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욕심, 이 밑에 깔린 이 땅의 욕망이 보여서였고, 부모들이 매달리는 양육‘법’이란 것이 결국은 자기 계발서와 다름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말을 바꾸며 결국은 별다를 것 없는 부모양육법은 커다란 도시 안, 빽빽한 아파트 속, 비슷비슷한 꿈을 꾸며 그렇게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처럼 보였다.

돈이 많아야 양육이 잘 되는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교육 목표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할 좋은 대학 가야 한다는 입시 지옥에서, 부모의 욕망과 아이의 욕망이 분리되지 않는 현실이, 그리하여 결국 양육은 너무 힘든 일이 되어 버린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글을 읽었다. 라오스의 어리디 어린 엄마들, 필시 한 권의 육아서를 읽은 적 없었을 그녀들이 아이들에게 언성을 높이는 걸 단 한 번도 보지 못 했다고. 그 어떤 아동학자보다도 여유 있게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한 치의 당위나 앞선 염려도 없이' 말이다.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오소희)

그 여유는 어디서 오는 걸까. 땅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문제라 할 수밖에 없을까. 탄생의 축복이 지나고 닥쳐오는 양육 스트레스. 당연스레 받아들일 고충들이 아닌 화나고 짜증나는, 말 그대로 스트레스. 한 사람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 하는 양육의 문제에 대한민국을 굴리는 가장 큰 욕망이 있단 생각이 든다. 욕심 없이, 욕망 없이 아이들을 길러낼 순 없을까.

그렇다면 나는 ‘다르게’ 키울 수 있을까. 결국은 또 돈으로써 가능한 대안교육 말고 내 태도를 다르게 가져갈 수 있을지의 문제. 따뜻하거나 똑똑하거나 그런 형용사가 달린 부모 말고 아이도 나도 자유로운 양육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키워나가려 애쓸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부모로서 행복하고 그리하여 아이도 행복해지는 길. 그리고 행복이 뭔지를 계속해서 물을 것.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바짝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생각만큼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떻게 살고 싶으냐의 문제와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다른 양육은, 가능하다.
덧붙임

윤미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