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 일반

낙태, 아동학대, 입양은 여성의 문제인가?

낙태는 남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장우진 감독의 단편영화 『하루』는 낙태문제를 비교적 솔직하게 담아냈다. 대학생 남녀는 설레는 여행을 연상하는 고속버스에 함께 올라타서도 전혀 들떠 보이지 않는다. 사실 둘은 낙태하러 낯선 소도시에 가는 길이다. 남자는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도움을 청하지만, 몇 백만 원에 육박하는 수술비를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수술을 받으려는데, 병원에서는 현금결제만 가능하다며 배짱을 부린다. 게다가 낙태가 출산과 거의 동일하다며 보약을 여성에게 먹여야 한다고 추가 지출을 유도한다.
이 영화에서는 남성의 시선으로 낙태를 그린다. 남자가 수술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돈을 모았는지, 아마도 여자와 결별할 것 같은 남자는 ‘아이까지 죽였다’는 상처로 한동안 심란할 것이라는 점, 수술 후 게걸스럽게 소고기를 먹은 여성의 하혈한 피를 보며 구역질하는 데서 여성의 고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출산에 준하다”는 낙태가 여성의 몸에 아로새기는 상처는 일면 간과된다.

젊은 남성들이 주로 찾는 극우사이트를 중심으로, 낙태 시술을 받는 여성들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시선이 확산되고 있다. 임신과 피임, 낙태 혹은 출산을 당연히 남녀가 함께 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은, 낙태의 책임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돌린다. 여성이 방종하게 섹슈얼리티를 즐겼다거나(방종하게 섹스를 즐긴 남자들은?), 책임감이 없고 잔인하고 이기적이어서 뱃속의 아기를 무참히 죽인다거나, 피임에 대해서 무지해서 제대로 임신을 피하지 못했다고 가차 없이 질책한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낙태 시술은 사실상 합법에 가까웠다. 이명박 정권 이후 보수기독인들의 공격적 영향력이 늘고, 이른바 “??녀 신드롬”으로 일괄되는 여성혐오가 퍼지면서 낙태는 몇몇 서구 국가들처럼 비난 대상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다. 낙태에 관한 책임이 양성에게 골고루 있지만 거의 전적으로 여성만 비난받는다. 낙태 후유증을 평생 몸과 기억에 지닌 채 트라우마를 수습해야 하는 몫은 여성에게 집중된다. 낙태를 살인이나 잔인성, 이기심, 무책임함, 도발적인 성, 성교육 부재 등으로 쉽사리 등치시키는 시각이 만연하다.
낙태가 남성 위주의 성관계나 폭력과 결부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애타게 사랑하는 남자가 성관계를 거부하면 헤어지겠다고 윽박질러서 반강제적으로 섹스에 응했다가 임신해서 낙태하는 경우, 결혼을 모색한 남자와의 임신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자 측 부모(및 남자친구)가 낙태를 완강히 강요하는 경우, 궁핍으로 출산 및 육아가 불가능한 지경에서 피임에 무관심한 남자와 임신했다가 낙태를 선택하는 책임을 오로지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것이 타당한가.

여성의 몸은 여성이 지배한다.

▲ 여성의 몸은 여성이 지배한다.


아동살해, 여성의 보살핌 노동과 관련돼 있다

최근 한국에서 부모, 특히 친모로부터 학대를 당하다가 살해당하는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아동인권이 발달한 나라들일수록 아동들이 살해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한국에서 자식들이 친부모를 살해하는 경우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드물듯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금기를 실제로 행하기란 어렵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관련 방송토론까지 줄을 이었다. 실정법 차원의 처벌뿐만 아니라, 그 어떤 범죄를 저지른 자들보다 윤리적으로 혹독하게 비난받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친자식들이 부모를 살해했을 경우 형량이 유달리 높은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는 부모에 의한 아동살해는, 자식이 부모를 죽이거나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는 것에 비해서 처벌이 약하다. 부모가 아이를 죽이면 언론이나 사람들의 관심도 태부족하며, 재발방지책이나 위기상태에 내몰린 아이들을 구조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개진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방어능력이 전무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을 강력하게 처벌한다. 언론에서는 범행 ‘동기’를 소상하게 보도하는 것을 삼간다. 한국에서는 아동살해 부모들이 “우울증, 육아의 어려움과 배우자의 비협조, 생계고” 등을 호소하면 어느 정도 관용되는 관행이 되풀이된다.
낙태를 혹독하게 반대하는 측에서는 지속적으로 뱃속의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갈 권리를 주창한다. 하지만 집단행동까지 불사하는 낙태반대론자들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당하는 학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편, 생모에 의한 아동살해를 알리는 짤막한 기사에 달린 댓글에는, 그럴 바에 낙태하지 않고 왜 아기를 낳아서 죽이느냐는 성토가 줄을 잇는다. 낙태나 아동학대를 둘러싸고 현실과 이상의 불협화음이 남성담론으로 구사되는 것이다.

부모에 의한 아동살해에서는 보살핌 노동이 일방적으로 여성에게 집중된 문제점이 나타난다. 자식을 살해한 여성들 중 육아의 무게에 반감을 가져서 극단적인 짓을 저지르거나, 이혼이나 별거 후 배우자나 남자친구가 육아나 양육비 지원을 전혀 하지 않아서, 어린 희생자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러한 ‘못된 엄마’들을 비판할 때도 ‘모성애를 거스른 채 여성/엄마의 역할을 등한시’한 점에 방점을 찍는다. 아이를 낳으면 부모 모두 보호자로서 의무를 충실히 해야 한다. 설령 둘의 관계가 파탄이 났더라도, 각자 자신이 맡아야 할 양육과 부양책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친부가 버젓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홀로 육아책임을 짊어진 여성이 아동을 학대했을 때, 어버이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한 ‘친부’에게도 합당한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
한국에서는 태어날 때까지의 인권은 치열하게 사수되고 있지만, 부모로부터 상시적으로 학대받으며 생과 사를 위험천만하게 오가는 아이들의 삶은 그저 복 없는 아이들의 문제로 외면받는다. 오로지 부모(특히 생모)가 거의 전적으로 아이의 안전을 담보해야 하는 후진적인 상황이다. 한국에서 심각한 아동학대가 재발되는 것은, 아동을 하찮은 소유물로 간주하는 일부 부모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관련 당국의 복지부동과 소위 ‘정상가족’에서 자라는 중산층 아이들에게 집중된 세간의 관심도 문제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고로 이러한 문제를 비뚤어진 생모들의 문제로 국한하는 시각은 해결책으로 나아가기 힘든 감정적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낙태도 어렵고, 비혼모 되기도 어려운 한국

얼마 전 초국가적 입양인들의 모임에서 몇 명의 입양인들이 자신들을 ‘버린’ 생모를 향한 그리움과 궁금증을 품는 것을 보았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입양인들은 도대체 어떠한 사정으로 자신을 버렸는지에 대해서 섭섭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입양인들이 언젠가 상봉하고 싶거나 원망하는 대상은 ‘친부모’라기보다 보통 ‘친모’였다. “왜 미혼모는 있는데, 미혼부는 없느냐”는 단편영화 『릴레이』의 대사처럼, 양육의 책임을 생모에게만 집중적으로 부여한다. “온전히 기를 자신도 없이 아이를 낳아서 무참히 버렸다”거나, “모성애라는 ‘여성적 특징’을 외면하고 어떻게 아기를 버릴 수 있느냐”는 세간의 비판 속에서는, 아기를 고아원에 맡기거나 유기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캐묻는 인식이 투영돼 있다.
필자가 만난 한 비혼모는 오래도록 천주교를 믿어서 차마 낙태를 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가난하게 살더라도 아기와 같이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용기 있게 출산해서 비혼모의 삶을 택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현실은 몇 배 더 가혹했다.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긴 후 닥치는 대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턱없이 적은 월급으로 집세에서부터 양육비를 조달하는 것은 몹시 어려웠다. 전문기술 없이 평생 저임금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사회적 약자로 고착되는 삶이 자신뿐만 아니라, 장차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대물림될까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가난한 한부모가정에서 자라는 아이에게 멍에처럼 달라붙을 편견과 기회의 불평등을 직감하며 그는 숱하게 입양을 망설인다. 주변의 냉대와 무관심은 낙태한 여성을 향한 시선보다 별다르게 우호적이지 않다. 만일 그가 가난과 편견이 힘겨워서 아기를 입양시킨다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게 아기를 버린 비정한 엄마”라는 격앙된 비난을 받으며 살지도 모른다. 한편, 아기의 생부는 (친모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질책을 받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한국에서 유자녀 부부가 헤어질 때 양육을 상대에게 떠넘기려는 사람들이 는다고 한다. 특히 법적인 관계 바깥에 놓인 커플들 가운데 여성이 일방적으로 책임을 껴안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국에서도 양육 책임을 부모 모두에게 부과하는 것을 강제화할 필요가 있다. 양육 의무를 도외시한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등, 적극적으로 아동의 안전과 행복을 증진하려는 움직임이 정례화되면, 증가일로에 있는 끔찍한 아동학대 및 살해가 차츰 해결의 실마리를 보일 것이다.

낙태, 아동학대, 입양이 여성만의 문제인가?

덴마크에서 십대 비혼모들을 돕는 멘토로 자원활동을 벌이는 아일랜드 출신 여성은, 사춘기시절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15살밖에 안 된 상태에서 엄마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이어도 낙태를 시술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린 다음에 가장 싼 배를 타고 영국에 가서 저가에 낙태 시술을 받는 곳을 찾아 헤맸다. 브로커가 소개해준 것은 병원이 아닌, 병원에서 일했던 노파가 위험천만하게 낙태를 해주는 불법시술 장소였다. 다른 선택권이 없었던 소녀는 자신의 몸을 노파에게 맡긴 후 낙태를 마쳤다. 이로 인해 40년이 지난 지금도 전신에 통증을 일으키는 만성질환을 앓는다. 그는 18살에 공장에 취직해서 사귄 남자와 딸을 낳았다. 하지만 남성은 출산 전부터 여성을 외면하다가 호주로 떠나서 연락이 두절되었다. 당대 아일랜드에서 비혼모가 아기를 기르는 것은 고달파서 그는 숱하게 입양을 고민했다.
아일랜드는 유럽국가들 중 낙태가 불법화된 나라로 악명이 높다. 심지어 산모가 임신상태를 유지하거나 출산할 경우 치명적인 건강문제를 야기할 것이 현저하게 예상되는 경우조차 낙태를 시술받기 매우 힘들다. 최근 아일랜드에서는 인도 출신의 치과의사 사비타 할라파나바르(Savita Halappanavar)가 임신부작용으로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았다. 그는 끈질기게 의료진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리며 낙태를 시술해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끝내 낙태를 거부해서, 그는 결국 단말마의 고통을 겪다가 며칠 후 비명횡사했다.
출산이나 가족계획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을 도모하는 입장에서 낙태 시술을 해주는 병원의 의료진들을 겨냥한 증오범죄가 유럽과 미국에서 속속 발생하고 있다. 낙태반대론자들은 이러한 병원 근처에 집결해 있다가, 낙태 시술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병원 밖에 나서면 집단적으로 힐난하며, 다른 낙태희망자들이 아예 병원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낙태 시술을 받기가 나날이 힘들어지면서 비교적 쉽게 낙태 시술을 해주는 나라에 방문하여 고액의 돈을 지출하거나, ‘위험수당’까지 얹어 막대한 수술비용을 요구하는 병원들의 꼼수에 여성들은 시달린다.
그나마 유럽선진국들에서는 아이를 출산하면 기본적인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 아기와 살 수 있는 자그마한 임대아파트가 제공되기도 하며, 출산비용이나 아기가 클 때까지 병원비를 국가가 상당 부분 부담한다. 북유럽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의 자식들이 교육기관에서 부모의 사회․경제․문화적 지위로 인해 차별을 받는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유럽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출산 후 국가가 책임지는 비중이 미미하다.

진정 생명권을 주창하고 싶다면 다음의 문제들에 대해서 진실한 답변과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인간이라면 응당 지니고 태어난 천부인권을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보장해줄 것인가? 여성의 성욕이 “낙태의 근본 문제”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남성의 섹슈얼리티와 수태력도 동일하게 억압되어야 하는가? 비혼모(부) 가구를 위한 실질적 대책을 어떻게 펼쳐서, 친부모가 낙태나 입양을 선택하지 않도록 이끌 것인가? 부모로부터 살해당하는 아이들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제도를 도입할 것인가? 출산과 양육 책임을 방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도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
그동안 낙태에서부터 아동학대, 입양 논의에서 여성들은 타자화되며, 도덕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몽땅 뒤집어썼다. 책임을 외면하는데 혈안이 돼있는 나머지 어버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으며 여성들에게 거센 증오와 폄하를 가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왜 낙태를 감행하는지 비혼모들이 겪는 현실이 자명하게 해명해준다. 양육 책임을 주로 생모에게 전가하는 인습은 아동학대의 가해자들이 차츰 생모들로 채워진다는 결과로 귀결된다.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기 쉬운 비혼모들이 결국 입양을 택하는 것도, 비혼부들의 무책임과 이기심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와 결부되어 있다.

네덜란드 페미니스트 의료진들이 낙태불법화로 인해 시술을 받을 수 없는 여성들을 위해 바다 위에서 낙태 시술을 시행 중이다. 이를 반기는 여성들이 '파도 위의 여성들' 선박을 환영하고 있다.

▲ 네덜란드 페미니스트 의료진들이 낙태불법화로 인해 시술을 받을 수 없는 여성들을 위해 바다 위에서 낙태 시술을 시행 중이다. 이를 반기는 여성들이 '파도 위의 여성들' 선박을 환영하고 있다.


자유로운 여성의 몸은 인권의 기본

출산과 낙태에 관한 여성의 권리를 피력하는 파도 위의 여성들 대포 레베카 홈페르츠(Rebecca Gomperts)

▲ 출산과 낙태에 관한 여성의 권리를 피력하는 파도 위의 여성들 대포 레베카 홈페르츠(Rebecca Gomperts)

네덜란드의 의사 레베카 홈페르츠(Rebecca Gomperts)가 주축이 되어서 결성된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이라는 페미니스트 의료 모임에서는 전 세계를 항해하며 낙태가 불법화된 나라에 사는 여성들의 절박한 낙태 요구를 들어준다. 바다 위에서 낙태를 시술하면 여성들이 처벌받지 않는 데 착안해서, 아일랜드에서부터 아르헨티나, 모로코, 폴란드를 가로지르며 몸에 관한 결정을 억압받는 여성들의 고민을 해결하는데 힘쓴다. 이들이 닻을 내릴 때마다 배의 정박을 훼방 놓는 이들이 한바탕 야단법석을 떤다.
원하지 않거나 미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작정 아이를 낳아서 겪게 되는 불행보다, 안전하고 저렴하게 낙태를 시술받는 것이 더욱 나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출산이나 보살핌 노동이 여성들에게 집중되는 현실에서, 낙태를 하기도 어렵고 비혼모나 빈곤한 기혼여성으로 아이를 기르는 것도 힘들다. 생명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효과적인 대안 없이 낙태를 죄악시하며 여성들의 몸을 서슬 퍼렇게 통제하려 든다.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부작용에 대한 책임도 결국 여성들에게 쏟아진다. 낙태와 보살핌노동, 입양, 비혼모의 위태로운 삶에서 여성들이 겪는 몸의 시련이 이어진다. 출산하는 여성, 아이와 부모로 구성될 법한 가구, 온갖 종류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의 삶이 초래하는 각종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묘안이 부족하다는 것을 각자 인정하면서, 이제 그 논의를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논의해야 한다.
덧붙임

나이테 님은 인권자유기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