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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를 홈리스라 부르지 못하고?

촘촘하고 튼튼한 홈리스지원법이 제정되어야

내가 상담 활동을 하다 만난 그린벨트(가명)님은, 수년 전 전기설비 일을 하며 살았던 쪽방에서는 특별히 뭐라고 불리지 않는 단지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명의도용을 당해 빚더미를 안게 되었고, 몸이 아파 실직 하게 된 다음에는 거리 생활을 하다가 병원에 실려 갔다. 그때 그는 ‘행려자’가 되었다. 다시 거리로 나와 부랑인시설에 들어갔을 때에는 ‘부랑인’, 노숙인 시설을 이용할 때에는 ‘노숙인’이라고 불렸다. 그의 상황은 바뀐 것이 없었지만 제도(노숙인및부랑인복지시설설치운영에관한규칙 제2조)의 편의대로 그의 정체성이 바뀌었던 것이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그린벨트로 묶여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활동가나 노숙 동료들은 그를 ‘그린벨트’로 불렀다. 쪽잠이지만 그가 매일 밤 잠을 자던 지하철역은, 최근 횡단보도를 설치했다는 이유로 새벽 시간이면 역사 내부를 폐쇄한다. 그는 순식간에 잠자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나름 최후의 주거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조차 쫓겨났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가재는 게 편이었다. ‘지하철시설물관리에관한규정’은 오히려 그를 ㅤㅉㅗㅈ아낸 서울메트로가 정당하다고 손을 들어주었다. 오늘밤도 그는 ‘오늘은 또 어디에서 자야 되나’ 걱정하며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일까, 노숙인일까, 부랑인일까. 뭐라고 불리든지 간에 현재 그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포괄적인 ‘홈리스’ 정의가 필요해

우리가 잘 보면 주변에는 그린벨트 님과 같은 ‘홈리스’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 구조의 경쟁사회에서 밀려나 생존의 경계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빈곤의 산 증인이다. 길거리에서, 시설에서 혹은 불안한 주거지(쪽방/고시원/여인숙/비닐하우스/만화방/찜질방 등)에서 생각보다 많은 숫자로 존재하는 이들은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존재였고, 차별과 낙인의 대상이었다. 사회에서 홈리스의 문제는 ‘개인의 게으름’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70년대 부랑인시설에서는 대규모 수용으로 이들을 격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겼고, 인권은 무시되었다. 1987년 3월22일, 전국 최대의 부랑아 수용시설인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던 중 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노숙인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었고 ‘실직노숙인’ 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면서 홈리스 문제가 개인의 게으름의 문제를 넘어 신자유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후 응급구호적 성격의 지원 체계가 마련되었고, 나아가 생활과 취업 등 자립을 지원하는 정책도 시행되었지만 여전히 시설 중심적이며, 이들의 욕구와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는 수준의 정책이었다.


2005년 부랑인과 노숙인 복지사업이 중앙과 지방정부로 분리된 이후에는, 그나마 있던 지원도 비체계적이고 비효율적인 행정으로 책임주체가 불분명해졌고, 때에 따라 지원도 고무줄처럼 줄였다가 없애기를 반복했다. 또한 현행 사회복지사업법 등에서는 부랑인/노숙인 복지 모두 시설 설치와 운영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홈리스 예방을 위한 내용은 담고 있지 않아 근본적인 홈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에 있어 소홀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홈리스에 대한 협소한 정의였다. 현행제도에 ‘홈리스’라는 정의는 없다. 노숙인과 부랑인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정의는 거리에서 생활하거나 시설에 입소한 자로 노숙인, 부랑인을 한정함으로써 법적 지원의 범위를 상당히 축소시켰다. 문제는 노숙인으로서 임시주거지원이나 임대주택의 서비스를 받게 되면 더 이상 노숙인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안정적인 주소지가 확보되면 홈리스들에게는 더욱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거처를 유지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노동의 종류가 조건부수급이나 ‘노가다’ 이외에는 전무하고, 거리에서 생활할 당시 당했던 명의도용이나 채무에 관련된 서류들이 날아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전히 위기는 극복되지 않았고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체계적인 제도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다. 그래서 다시 거리로 돌아가거나 시설을 배회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노숙인/부랑인이라는 단어로 포괄할 수 없는 대상을 ‘홈리스’란 단어로 광범위하게 정의해야 한다.

홈리스 지원법이 갖추어야 할 것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홈리스지원법 관련 법률안은 3개로, 유재중 의원(한나라당)의 ‘노숙인·부랑인 복지법안’(2010.12.6)과 이낙연 의원(민주당)의 ‘홈리스복지법안’(2011.2.18), 곽정숙 의원(민주노동당)의 ‘홈리스 인권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2011.3.19)이 각각 발의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지원받을 대상의 범위와 인권보장의 명시가 다르게 규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 의원의 법안을 살펴보면 노숙인/부랑인을 구분하고 있지만 경계가 애매하다. 부랑인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말 뒤에는 ‘펀둥펀둥 놀면서 떠돌아다니고 난붕이나 피우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뿌리 깊은 낙인이 숨어있다. 이런 의미를 가진 용어가 법으로 규정된다면 지원을 받는 홈리스는 누구든지 사회적으로 ‘낙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 의원은 지원 대상을 19세 이상으로 연령을 제한하였고, 노숙인/부랑인시설에 있거나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정책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다양한 형태의 주거불안계층 홈리스를 정책대상에서 배제하기 때문에 법의 적용범위가 매우 협소함을 확인할 수 있다. 포괄적인 의미의 홈리스를 위한 예방책과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적극적인 고민이 없으며 기존 노숙인 복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법안에 불과하다. 동시에 홈리스 인권보장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홈리스지원법이 보기 좋은 법이 되기보다 실질적인 법안이 되려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들어가야 한다.

먼저, 포괄적인 주거보장의 대상으로 홈리스의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그 범주는 ‘일정한 주거가 없는 자, 시설 생활자, 주택으로서 부적절한 곳에 생활하는 자, 퇴거 위기에 처한 자’여야 한다. 이들이 처해있는 상태를 고려하여 지원할 수 있는 개념이어야 하는데 노숙인/부랑인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홈리스 용어를 두고 외래어라서 법률용어로는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단체들이 있다. 외래어라서 안 된다면, 정책이나 법 용어 중 ‘한강 르네상스’, ‘뉴타운’, ‘로스쿨’ 등 이런 것부터 바꿔야 했다. 왜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법에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지 모르겠다. 기존 노숙인/부랑인이라는 사회적 낙인의 탈피를 위해 보다 폭넓은 범주로 넓히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또한 홈리스법에는 복지수급권 보장을 비롯한 인권보장이 반드시 명시되어야 한다. 거리에서 노숙을 하든, 쪽방에서 일세를 주고 살든, 시설을 이용하든 간에 누구든지 홈리스 상태에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복지조치에 대해 이의신청과 같은 권리구제 제도와 정보공개 청구권을 명시해야 하며, 개인정보의 수집과 이용에 있어 ‘수집동의, 열람, 수정청구’와 같은 홈리스의 결정권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홈리스 예방정책을 실시하고, 홈리스 복지를 후퇴시키는 조치들은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가 홈리스 발생 예방을 위해 주거지원과 사회서비스 제공을 실시해야 하며, 입주민의 동의 없는 철거는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거리홈리스에게 퇴거를 목적으로 하는 고의적인 조치들을 금지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될 때 홈리스지원법이 복지를 지원하는 차원의 법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린벨트님과 같이 최후의 삶의 자리에서 쫓겨날 상황에 놓인 수많은 홈리스의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보다 더 촘촘하고 튼튼한 그물망이 될 것이다.

덧붙임

박사라 님은 홈리스행동 집행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