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 세계의 인권보고서

[세계의 인권보고서]무상교육이냐 돈벌이냐 (Free or Fee)

2006년 세계 교육권 보고서

<역자 주> 2월과 3월,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때가 돌아왔다. 과연 모두를 위한 교육권의 성취를 어깨 펴고 가슴으로 기뻐할 수 있는지를 돌아봐야 할 때이기도 하다.
이 보고서는 최초 ‘교육권에 관한 유엔 특별 보고관’이었던 카타리나 토마세브스키(Katarina Tomasevski)가 죽기 직전 남긴 마지막 보고서이다. 170여 개 국의 교육관계법과 관행을 조사하는데 6년여가 걸린 이 보고서는 2006년 8월에 발표됐고 그녀는 같은 해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교육권과 기본적 인권 옹호에 생애를 바친 그녀는 이 보고서에서 무상교육에 대한 인권적 접근과 교육권을 껍데기로 만드는 국제금융기구와 정부들의 위선을 거침없이 질타하고 있다.
아래 글은 300여 쪽에 가까운 이 보고서의 서론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이 보고서의 원문은 http://www.katarinatomasevski.com/images/Global_Report.pdf 에서 볼 수 있다.

말로는 교육권, 실제로는 돈벌이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없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가격 때문이다. 그런데도 공교육이라 말한다. 법적으로는 무상이지만 실제로는 돈을 내야하는 데도 말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대학에 다닐 수 없는 것도 아주 나쁜 일이지만, 초등학교 아이들이 말만 공교육인 교육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일해야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상처에 소금 뿌리는지, 교육권에 대한 말의 성찬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국제사회’의 한편에선 국제적 결의안, 선언, 권고들이 넘쳐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정부들이 교육에 비용을 부과하도록 강요해서 교육권을 부정하게 만든다.

80여 년 전, 정부들은 교육을 무상 의무화해야 한다고 한 규범은 산업화된 국가들의 관행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국제사회’는 이를 채택했다. 그럼으로써 아동노동을 방지하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이 모델은 보편적으로 보장된 교육권이 됐고, 유엔은 큰 소리로 교육권을 선포하고 나선 조용히 배신했다. 세계적으로 교육의 조종자는 은행(은행은 돈이 안되니까 무상의 공적 서비스를 지지하지 않는다)과 교육서비스를 수출하는 정부들(교육이 무상의 공적 서비스가 되면 이들은 수십억 달러를 잃게 된다)이다. 경제적 배제라는 쓴 약을 설탕으로 겉칠 하듯이, 지구적 노동 분화는 인권을 이용한다. 더 나쁜 것은, 그런 배제에 대한 도전을 교육은 인권이 아니라며 부정하여 방해하는 것이다.

교육권을 위해 무슨 처방이 필요한가는 할 일을 안 하는 죄와 저지른 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안한 죄는 무상 의무 교육을 정부의 의무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정부들은 무상 교육을 제공하지 말고 그 비용을 가족과 지역사회에게 전가시키라는 압력을 받는다. ‘무상’ 교육을 말할지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투자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문다. 일반적으로 징세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필수적인 정책의 지렛대인 공공재정이 아예 빠져있다. 세계적 교육 구상은 미국 정부의 정책(교육이 권리라는 걸 부정한다)과 일치되며, 이것은 미국의 복사판인 세계은행에 의해 증폭된다. 하지만 교육과 인권의 주체들은 아직 이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그런 도전의 필요성에 부응하려 한다. 교육은 ‘모든’ 아이들을 다 품을 수 있도록 보편화돼야만 한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의무적이려면, 무상이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탈공업화된 국가들이 지난 2세기 동안 실천해온 것이다. 인권의 도전 필요성은 ‘이중 기준’에서 나온다. 이중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훨씬 낮은 기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적용하려 든다.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열리는 유엔 건물

▲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열리는 유엔 건물



왜 단일한 지구적 교육전략이 없는가?

모든 아동을 위한 무상의무교육은 국제인권법의 중추이지만 단일한 지구적 교육 전략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식적인 정책 결정에서는 한 국가당 한 표이지만, 그러한 정책들의 자금을 동원하는 결정에서는 일 달러 당 한 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적 교육 거버넌스에서 개별 정부의 무게는 그들의 지갑의 힘으로 결정된다. 가령 외교부는 교육권에 대한 지구적 선언을 지지할 수 있지만 동시에 통상부는 교육의 수출 증가를 협상한다. 최악의 경우, 이런 정부들은 가난한 나라의 교육기회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이익을 취하는 위선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자국의 교육 기관이 벌어들이는 이윤 때문에 비판은 쉽게 침묵된다. 재정부는 가난한 채무국의 무상초등교육을 방해하는 외채 서비스를 지원하는 반면 성평등부는 그런 외채서비스에 내재된 여아에 대한 교육의 배제를 안타까워한다. 일부 부채 삭감을 이유로 비판을 누그러뜨릴 수 있지만, 부채삭감이 원조삭감으로 귀결된다면 헛된 일이다.

부채 삭감과 관련된 뉴스 제목은 큰 글씨인 반면에 두꺼운 공식 문서의 작은 글씨를 읽는 사람들은 없다. 부채삭감의 조건과 교육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 즉 약속된 부채삭감으로 얼마만큼의 돈이 교육에 할당되는지는 그 작은 글씨에 달려 있다. 일반적 규범은 모든 기금이 빈곤 축소에 쓰여야 한다는 것이지만, 빈곤축소의 개념은 에두른 것이어서 마치 부채 삭감 기금이 모두 빈곤축소에 쓰인 것처럼 통계적으로 분류된다.

OECD 국가들은 WTO 규범아래 자신들의 수출을 보호하는 걸 우선시하기에 보편적인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에 대한 막연한 약속은 뒷전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세입원은 낮고 재정적자는 높기에 무상교육을 위해 공적 재정을 증가시키기 어렵다. 인권법은 교육에 대한 공공 투자를 늘릴 것을 명하지만 국제금융기구들은 재정적자를 줄일 것을 요구한다. 국제 개발 원조를 받으려면 이 조건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인권법은 무시된다. 결과적으로 무상이어야 하는 공교육은 수업료, 즉 돈을 위한 것으로 바뀌고, 교육비용은 정부에서 가정으로 이전됐다.

왜 세계은행의 경제학자들에게 교육을 맡겨선 안되는가?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은 규모의 경제 또는 서비스의 효율적인 전달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각 나라에서 전개돼온 교육의 특질을 놓치고 있으며 모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모델(one-size-fits-all model)에 각각의 특질을 억지로 구속시키려 한다.

교육이 빈곤 축소와 규모의 경제, 서비스의 효율적인 전달의 도구로 격하돼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대규모로 값싼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데는 유용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가치 있는 교육이 아니다.

교육이 무상이고 의무여야 한다는 말은 세계은행의 교육 용어에서 빠져있다. 무상의무교육은 인권법에 통합되며, 인권법은 정부가 교육을 제공하거나 교육이 제공되도록 보장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것은 적절하고 지속적인 공적 재정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그 대신에 세계은행은 교육을 수요와 공급의 용어로 분석한다. 세계은행은 요구되는 교육발전을 “교육의 기존 소비자들에게 수행과 효율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교육접근권의 확대를 “현재 소비하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서비스를 전달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학생 아동이 어떤 효율적으로 전달돼야 할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바로 교육 개념 자체를 거스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비스’란 밝게 칠해진 교실과 예쁜 책으로 효율적으로 전달되지만, 교육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학생은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한다.

효율성의 잣대로 교사의 권리를 부정해서는 교육이 학생들의 배움을 촉진할 수 없다. 공적 서비스의 제공자들, 특히 교사들은 많은 국가들에서 노동권과 직업상의 자유를 부인 당함으로써 권한을 뺏기고, 예산 삭감으로 빈곤해진다. 공적 기금은 부족하며 자유시장에서 교육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조하는데 공적 기금이 쓰여서는 안 된다는 명목으로 공교육의 질은 결과적으로 나빠진다. “사교육 시장에서 제공하는 것보다 공적 서비스의 질이 아주 낮다”며 시장에서 교육을 사라고 부추긴다. 따라서 공교육의 빈곤화는 사교육을 구입할 여유가 되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공교육을 탈출하도록 유발한다. 또 많은 국가들에서 이런 게 교육개혁의 하나이다.

기쁘게도 세계은행식 모델에 교육을 맞추는 것에 대해 세계적으로 상당한 반대가 있다. 이 보고서가 강조하는 바는 모든 아이들이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학교에 갈 수 있도록 교육을 무상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국제인권법에서 교육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은행은 무상교육을 ‘구호품’에 빗대어 말한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세계은행 관계자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리 경험상, 가난한 사람들은 구호품을 갖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적절한 질이라면 서비스에 대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 합니다.”

‘구호품’같은 모욕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걸 보면, 세계은행이 무상의 공적 서비스로서의 교육에 얼마나 저항하는지가 드러난다. 사람들이 무료인 공적서비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거짓임은 무상에서 유상으로의 공적서비스의 전환에 반대하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밝혀졌다.

시장은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에선 돈 주고 서비스를 사는 것이다. 의무교육에서 ‘과도한 수요’란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아이에게는 교육에 대한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교육이 일으키는 사회화와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아동의 부모에게 의무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가장 알맞은 교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자녀에게서 교육의 권리를 뺏을 수는 없다. 교육은 또한 국가에게 의무이다. 국가는 모든 젊은 세대가 교육받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 일에 실패한다면 국가 자신의 미래가 위태롭게 된다.

인권법은 지구적 목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국제인권법은 교육권의 점진적 실현을 명하고 국제협력이 이 과정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보편적인 인권으로서 교육을 선포한 것은 권리에 대한 권한을 확대하는 걸 목표했다. 국내에서는 조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에 지불하는 것이 보장되지만 국제적으로는 그와 대등한 것이 없다. 유럽의 성인 한명은 1인당 2만5천달러의 GNP로 세 명의 아동교육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반면 아프리카의 성인 한명은 1인당 5백달러의 GNP로 6명의 아동을 교육해야 한다. 이런 불평등한 부담을 고칠 국제적 약속은 없다. 결과적으로, 교육에 대한 ‘접근’(access)은 그에 상응하는 정부의 의무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권리’라는 용어는 회피된다. ‘접근’이란 말은 자유 시장에서 구입한 교육 또는 자선을 통한 재정에 걸쳐있다. 교육에 대한 접근이 없다면, 이것은 과도한 수요로 정의되거나 불평등한 것으로 안타까워할 일이기는 하지만 인권침해의 비난을 일으킬 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국제인권법의 목적은 권력 남용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다. 국제인권법의 핵심 목적은 교육에서의 침해를 포함하여 인권침해를 폭로하고 반대하는 것이다. 현행 지구적 교육 목표에서 국제인권법을 배제하는 것은 권력 남용을 촉진했다. 공적인 약속이 없는 체함으로써 의무를 피하려는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권력 남용도 없기 때문에 인권 보호의 필요성도 전혀 없을 것이다.

인권침해자들은 왜 나쁜 교육가인가?

전쟁과 억압을 보조하는 과세 또는 국제원조는 교육기금을 고갈시킴으로써 교육에 대한 간접세를 과하고 있다. 이런 왜곡된 우선순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침묵시킴으로써 교육에 대한 간섭세가 강요된다.

정책적으로 인권을 부인하는 정부는 교육도 부인하므로 교육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정부는 억압에 대한 저항이 생득적 권리라는 것을 배우지 못하도록 인민에게서 교육을 박탈할 것이다. 가난한 국가들의 부자 정부들은 권력 강화를 위해 기금을 사용한다. 그래놓고 가난 때문에 교육에 재정을 댈 수 없다고 변명한다. 정부간 기구들은 빈국을 돕기 위해 개입하여, 그 정부가 할 수 있지만 하려하지 않는 일을 한다. 이런 식의 정부 기능 대체는 정부의 권력 남용에 대한 침묵을 필요로 한다. 권력남용은 피해자 또는 인권단체들이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다고 폭로할 때야 터뜨려진다. 흔히 국제간 기구들은 인권침해의 촉진자로 정의된다.

정부는 교육을 제도화된 세뇌로 변질시킬 수 있다. 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아동을 학교에 등록시키라고 서둘면서 정작 해야 할 질문을 피하려든다. 교육이 제도적 세뇌에 해당한다면, 아동과 청소년의 학교가지 않을 권리를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2008년 전국에서 모인 100명의 중고생 등 청소년이 4‧15조치가“학생들이 교육권과 발달권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내며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2008년 전국에서 모인 100명의 중고생 등 청소년이 4‧15조치가“학생들이 교육권과 발달권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내며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인권법은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의한다. 해야 할 일 중에 최상위는 모든 아동에게 교육을 보장하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모두 했는가는 질문은 어디에나 관련된다. 르 몽드의 한 사설은 “무책임한 정책들이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준비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어깨에 1천억 유로의 공공부채를 지웠다”고 개탄했다. 이처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악의 대가는 광범위한 청년 실업과 우발적인 폭력의 분출이다. 특히 빈부간에 잘못된 구분선이 인종, 언어 또는 출신으로 표시되는 소속의 경계와 일치되는 곳에서 그렇다.

자유에 대한 존중은 의무교육에 내재된 정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한다. 교육을 검토하기 위한 렌즈로 인권을 사용하는 것은 ‘교육으로부터의 배제에 도전하는 일’과 ‘교육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를 묻는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교육 통계는 흔히 숫자계산밖에 모르고 그런 계산에 내재된 한계가 문제시된다. “학교를 위한 학교교육”, “죽은 목적의 교육”이란 말이 있다. 학교교육은 교육의 목적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인권의 보호 없이 모두를 포괄하는 의무 교육은 “선을 위해 사용되건 악을 위해 사용되건 간에 모든 학교 체제의 특질”로서 주입을 제도화한다. 경제학자들은 단지 교육재정을 대는 게 아니라 정부가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정부 주장에 대한 설명을 주입에서 찾았다. 인권보호의 구상은 교육이 선을 향하고 악을 멀리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점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개선된 교육적 통계에는 떠들썩한 환호가 동반되지만 정부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큰 침묵이 따른다.

인권침해는 무시될 수 없는 문제로서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이것은 과거 40여 년 간의 인권활동의 자랑스러운 성취이다. 인권법은 숫자계산이 회피하는 질문을 물어야 한다.

왜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2차 이라크 침공이 임박한 2003년 2월, 영국에서 ‘평화를 위해 손을 들자’ 캠페인을 조직하여 청소년으로서 유명인사가 된 키에라 박스(Kierra Box)는 당시 17세였다. 그녀는 캠페인을 ‘반전’에서 ‘평화옹호’로 바꾸기로 맘먹고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분에게 관심가질 만한 여유가 있어야 여러분은 관심을 갖는다. 여러분 자신의 세상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일을 신경 쓸 시간은 없을 것이다.”

아동이 초등교육비용을 내기 위해 일해야만 하는 곳에선, 저항 운동을 조직할 시간과 힘,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아동의 잠잘 시간조차 빼앗는다. 교육은 아동이 성인기로의 모험을 하기 전에 필요한 능력과 사회화를 제공해야 한다. 흔히 아동은 생계비를 버는데 필수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학교를 나가도록 강요받고, 무권리 조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도록 사회화된다. 억압 속에서 자라는 아동은 억압에 대면할 수가 없거나 억압이 사라져도 억압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억압과 비교할 수 있는 대안적인 체제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저항운동을 조직하는 일은 그것이 가장 필요로 되는 곳에서 가장 어렵다. 이 보고서가 드러낸 바대로 이 세상에는 100명의 교사당 적어도 150명의 군인이 있다. 경험법칙상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부는 교육을 우선시하고, 독재는 재정으로 교육을 고갈시킨다.

모든 아동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초등 교육은 ‘재정 압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은 국제인권법이 명한 바이며, 2005년 세계정상회의의 결과로 시인되었다. 그러나 국가들의 기록이 드러내는 바는 초등교육비용이 연간 가계 예산의 30%이상이며 교육부가 쓰는 돈보다 5배나 많다는 것이다.

더욱이 공립초등학교에서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많은 나라에서 불법이지만, 그런 법은 알려지지 않거나 혹은 알면서도 무시된다. 불법인 국가 정책을 국제적으로 지지하는 것보다 법의 지배에 더 해로운 일은 없다. 이러한 명백한 권력 남용은 공개적이고 효과적인 반대에 부딪혔을 때야만 변화될 수 있다.
덧붙임

류은숙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