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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불운의 스타 글리벡

‘몸 사냥꾼’한테 걸리지 않게 조심하시라

[기획] 불운의 스타 글리벡 (2) 리허설

<편집자 주> 약이 없어서 죽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는다는 환자들의 절규. 그러나 의약품을 둘러싸고 어떤 문제들이 있어 약이 필요한 사람들이 먹을 수 없게 됐는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인권오름>은 의약품의 연구, 개발, 생산, 공급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사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한국에서 의약품접근권 운동의 출발점이 된 의약품 '글리벡'. '불운의 스타 글리벡'이 들려주는 우여곡절 회고록을 통해 의약품에 대한 우리의 권리가 어디에서 가로막히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 바닥에서는 유명한 대스타건, 무명이건 간에 반드시 거쳐야 할 리허설 무대가 있다. ‘임상 시험’이라고 하는데, 이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산삼에 백사(白蛇)까지 넣어 끓여댄 만병통치의 명약이라도 데뷔를 할 수 없다. 우리가 데뷔하여 서게 될 진짜 무대는 ‘사람의 몸’이기 때문에 이 리허설이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지. 이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면, 제 아무리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린 대단한 약이라도, 사람들 앞에 나올 수가 없거든. 억울하지 않겠냐고?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그래서 ‘제2의 탈리도마이드’라는 치욕적인 오명을 덮어쓰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아.

탈리도마이드의 전설과 헬싱키 선언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는 독일의 그뤼네탈(Gruenenthal)이라는 제약회사가 판매했던 약인데 임산부의 입덧 진정제로 많이 사용되었어. 나보다 더 먼저 태어난 선배들 이야기에 의하면 자기가 ‘부작용 없는 기적의 약’이라며 엄청 우쭐댔다고 하더군. 그래서 선배들이 탈리도마이드만 보면 “쟤 때문에 언젠가 이 바닥에서 사단이 날 거다.”라고 걱정했대.

'부작용 없는 기적의 약'으로 선전되던 탈리도마이드는 결국 태아의 기형을 일으키는 약이었음이 밝혀졌다.<br />

▲ '부작용 없는 기적의 약'으로 선전되던 탈리도마이드는 결국 태아의 기형을 일으키는 약이었음이 밝혀졌다.


아니나 다를까. 1957년 판매되기 시작한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임산부들이 기형아를 낳게 된 사실이 3년쯤 지나 밝혀진 거다. 전 세계 46개국에서 1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특히 유럽에서만 8천 명이 넘었어. 결국 탈리도마이드는 20세기 최대의 의약품 부작용 참사로 기록되었지. 유럽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중 보건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최초의 유럽의약품지침(Directive 65/65/EEC1)을 만들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약효를 검증하는 임상시험 과정이 과학적‧윤리적으로 정비되었어.

1964년 세계의사회 제18차 총회에서 채택된 이후, 임상시험의 기본원칙이 된 ‘헬싱키 선언’은 탈리도마이드와 같은 대참사를 통해 얻은 성찰의 결과물인 거야. 전체 32개 조항으로 이뤄진 이 선언문은 “인체를 이용한 의학 연구에 있어서 피험자의 복지에 대한 고려가 과학적, 사회적인 면의 이익 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제5조)”라고 천명하지. 국익, 과학의 진보, 기타 등등의 온갖 ‘성스럽고도 잡스러운 목적’을 위해 가뿐하게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또한, “현재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의료와 의학 연구는 예방, 진단 및 치료법들에 있어서 여러 가지 위험과 부담을 수반(제7조)”한다는 걸 언급하면서, “의학 연구는 전 인류에 대한 존중심을 증진시키고 인류의 건강과 권리를 보호한다는 윤리 기준에 적합해야 한다.(제8조)”라고 명시하고 있어. 덧붙여 “경제적, 의학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피험자가 특히 더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궁무진한 ‘만병통치 빙자 사기’ 매뉴얼

그렇다면 과연 임상시험을 실시하는 주체인 우리의 소속사님들께서 이 원칙들을 제대로 지키고 있을까? 내가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 기억하지? 이 녀석들 천생 사기꾼이라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약의 효능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임상시험은 1상, 2상, 3상으로 진행된다. 제1상 연구에서는 우리가 먹어도 될 만한 안전한 약인지 판단하고, 제2상 연구에서는 약이 가진 효능의 단서를 확인해 보지. 마지막 제3상 연구는 비교적 많은 수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1상, 2상의 연구를 확증하기 위해 시행되는 거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돈에 눈이 먼 제약회사들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 입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별 짓을 다 시키거든. 그게 우리 능력 밖의 일이든, 아니든 상관도 안 해. 우리 자존심만 망가지면 상관없는데, 사람들 몸을 망가뜨리게 될까봐 항상 전전반측, 전전긍긍이다.

임상시험을 둘러싼 제약회사의 악랄함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br />

▲ 임상시험을 둘러싼 제약회사의 악랄함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새로운 약이 ‘더’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기존의 약들과 비교를 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데, 제약회사들은 기존의약품이 아닌 ‘밀가루’랑 비교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환자에게 심리적 효과를 얻게 하려고 주는 가짜 약(위약, placebo)을 진짜 약의 비교 대상으로 삼는 거다. 기존의약품과 비교할 때는 용량을 매우 낮게 잡거나, 주사로 맞아야 하는 걸 입으로 넣는 등 별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기존 약물의 효과를 확 떨어뜨려서 신약이 ‘더’ 좋다고 들이민다. 내 참, 이런 식이면 세상에 약 아닌 것이 없지.

녀석들의 ‘만병통치 빙자 사기’ 매뉴얼은 이것 말고도 무궁무진하다. 고령자들에게 주로 쓰이는 약의 시험대상으로 젊은 사람들만 참여시켜서 엄청 안전한 약으로 만들어 버리질 않나, 혈압약이나 우울증 치료제처럼 오랜 기간 관찰해야 하는 약들의 임상시험 기간을 대폭 줄여서 장기간 복용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은폐해버리기도 한다.

개똥 위에 쇠똥 눈 걸 약이라고

부정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거나, 일부만 제시하는 일은 비일비재해. 1987년에서 2004년 사이에 FDA(미국 식품의약국)는 열두 가지 항우울제를 승인했는데 그 약들이 거친 리허설이 74건이었어. 결과가 어땠냐고? 그 중 38건에서만 항우울제가 효과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물론 긍정적인 결과는 단 한 건을 제외하고 모두 의학 저널에 공개됐지. 그런데 효과가 별로 없는 것으로 드러난 36건의 임상결과는 3건만 공개된 데다가 11건은 오히려 ‘효과가 있다’고 결과를 조작했다더군.

이 바닥에서 잘 나가는 우울증 치료제들이 있는데, 프로작(Prozac), 세로자트(Seroxat), 이펙사(Effexor)라는 애들이야.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이 복용했고, 그래서 그 수입만 수십조 원에 달해서 소속사들이 ‘블록버스터’라고 부르는 스타들이다. 항상 셋이 붙어 다녀서 우리들은 얘들보고 ‘삼성’이라고 부른다. 왠지 어감 안 좋지? 놀라지 마시라. 이 녀석들 ‘밀가루’랑 다를 바 없다는 게 들통났거든! 옛날 약장수들은 개똥 위에 쇠똥 눈 걸 가지고도 약이라고 팔았다는데, 이거나 그거나 다를 게 뭐가 있냐. 차이가 있다면 뱃심으로 벽돌 깨부수는 차력이 아니라 ‘최첨단 어드밴서드 뉴 하이테크놀로지 어쩌고저쩌고~♪󰁔’로 광고하는 것만 다르겠지.

그나마 1, 2, 3상으로 착실하게 단계별 코스 밟는 것도 이제 옛 이야기다. 하루라도 악착같이 더 벌어보겠다는 제약회사들이 정부를 상대로 하도 난리를 처대서, 요즘에는 ‘시판 후 조사(PMS, Post-Marketing Surveillance)’라고, 짧은 임상 단계를 거친 약들이 일단 먼저 시판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어. 어떤 신약은 하루 수백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기도 해서, 걔네들 소속사는 임상시험기간을 줄이는 것이 바로 ‘돈’이 되는 걸 알거든. 그래서 요즘 엉터리 약들이 많이 나와 우리들 체면 갉아먹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소속사들은 시키지도 않은 임상시험을 일부러 한 번 더 하기도 해. 이미 시판 허가를 받은 의약품에 대해, 흔히 ‘제4상’이라고 불리는 임상시험을 하는 거지. 무슨 소리냐고? 의약전문기자라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보도 있잖아. “○○암 치료제로 허가를 받은 A라는 약이 □□암에도 효과가 있다는 임상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라는 뉴스 말이야. 그러면 제약회사들은 득달같이 의사들을 찾아가서 “A가 □□암에도 효과가 좋다고 하니 □□암환자에게도 A를 써주세요.”라며 영업을 시작하지. 임상시험이라고 하지만 까보면 그 자체가 장사야. 제약회사가 스폰서를 대서 연구를 시키는 거거든. 이미 쓰이고 있는 약의 이런 저런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잡스러운 기능을 만들어내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야.

‘몸 사냥꾼’이라고 들어봤나

소니아 샤의 <몸 사냥꾼> 표지<br />

▲ 소니아 샤의 <몸 사냥꾼> 표지

이것뿐만이 아니다. 천생 사기꾼인 제약회사는 ‘몸 사냥꾼’으로 거듭나기까지 했다.

FDA에 신약 승인을 신청한 제약회사들은 해외에서 매년 1,600여 건의 임상시험을 하고 있어.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의약품의 약 80%가 서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소비되니까 임상시험도 당연히 저 지역에서 이뤄질 거라 생각하겠지. 아니다. 대부분의 임상시험의 시행되는 곳은 동유럽,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는 가난한 나라들이다. 이 나라에서 제약회사들은 헬싱키 선언 ‘따위’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어버릴 수가 있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환자들은 그저 약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꺼이 임상시험에 응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돈을 주고 약을 사 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거든. 제약회사 눈에는 이만한 파라다이스가 없지.

이러다가 의학 역사상 최악의 임상시험이라 불리는 ‘터스키기 매독 연구(Tuskegee Syphilis Study)’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지. 이건 드라마 <엑스 파일(X-file)>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1932년부터 1972년까지 40년 동안 미국 앨라배마주 터스키기 주변에서 매독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이 진행됐어. 가난한, 대부분 문맹인 아프리카 계 미국인 소작농들이었지. 시험 대상이었던 399명의 매독 환자들은 의사들이 종종 검진을 오니까 자신이 치료받는 줄로만 알았어.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의사들은 치료는 전혀 하지 않고 매독의 자연적 진행 경과만 관찰했던 거야. 전 세계가 경악했지.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소니아 샤(Sonia Shah)가 <몸 사냥꾼(The Body Hunters)>이란 책까지 냈다.

이런 임상시험이 늘면 늘수록 가난한 환자들은 그만큼 더 큰 위험을 떠안게 되지만, 그렇게 해서 개발된 신약의 수혜는 대부분 선진국 환자에게 돌아간다. 예컨대,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에서 발병률이 높은 위암은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관심 밖이다. 한국 식약청에 따르면 2007년 2월 진행 중인 한국 내 임상시험에 참여한 피험자 7,630명 가운데 위암 환자는 357명인 반면 폐암 환자는 두 배가 넘는 757명이라더군. 다국적 제약회사가 한국인의 몸을 이용해 미국과 유럽에서 발병률 1위인 폐암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는 거지. 재주 부리는 사람 따로 있고, 돈 버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나도 리허설을 겨우 마치긴 했다만

황당함을 넘어 참혹하기까지 했던 리허설을 겪은 저 약들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양반이다. 1998년 6월에 본격적으로 나의 임상시험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리허설을 앞두고 걱정 많이 했다. 나 역시 ‘만병통치 빙자 사기꾼’이 되거나 ‘몸 사냥꾼’이 될까봐…….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는 임상시험 대상자를 찾기 어렵다고 하더라고. 아직 약효나 안전성이 입증된 약물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시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보통 ‘실험’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하지만 죽음을 앞둔 백혈병 환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며 나의 임상시험에 참여해주었어!

그리고 마침내 2001년 5월, FDA는 환자들이 나를 복용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다! 1960년 나의 탄생이 예언된 이후 40여 년, 그 인고의 시간이 눈앞에 스쳐지나가더군. 그 시간 동안 나와 함께 나의 데뷔를 기다려주고, 내 소속사인 노바티스의 온갖 횡포로부터 나를 지켜준 환자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더군.

한국과의 인연은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났을 때인 2001년 6월에 시작되었다. 눈물나게 벅찬 데뷔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던 때였지.
덧붙임

강아라 님은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홍지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