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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②]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전문과 제1조


이제 세계인권선언(아래부터 선언) 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선언 전문과 1조를 읽어보면 18세기의 근대인권선언과 세계인권선언의 언어는 유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고유한 존엄성”,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 “태어날 때부터” 등의 표현이다. 1조의 첫 문장은 1789년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게 된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계몽주의 철학에 근거한 것인가? 선언에는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기초가 깔린 것인가?

세계인권선언의 철학적 기초

선언의 기초자들은 논쟁 끝에 ‘신’과 ‘자연’에 대한 언급을 삭제했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인간 이성과 양심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쟁을 피하고 어떤 가치도 절대자나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으로 보지 않는 세속적인 문서를 만들려 했다.

권리 목록(내용)에 대한 합의가 시급한 과제였기에 선언 자체에 인권에 대한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기초가 명시될 수 없었다.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기초가 없다는 것이지, 아예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 자유주의적 자연권 사상, 사회주의 사상 등이 선언에는 담겨있다. 선언에 대한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공통된 관념적 사유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공통의 실천적 인식에 근거해서였고, 이 세계에 대한 하나의 동일한 개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행위를 인도할 수 있는 하나의 신념체계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선언에 담긴 여러 색깔의 철학 중에서 전문과 1조에서는 계몽주의 사고방식이 유별나게 드러난다. 인권을, 단지 인간임으로서 해서 다른 어떤 이유(가령 사회계약, 정부의 행위, 의회나 법원의 결정 등)도 없이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인간 본성의 원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나, 인권이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국가행위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어떤 사람이나 정치적·사회적 기관이 준 것이 아니기에 우리로부터 빼앗아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주의권 대표들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세계인권선언의 초안 작성 과정 (출처 : www.ohchr.org)

▲ 세계인권선언의 초안 작성 과정 (출처 : www.ohchr.org)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신과 자연”은 삭제됐지만 1조에서 “이성과 양심”이란 용어는 사용됐다. 이때 “이성과 양심”이 오독될 위험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 의견은 ‘이성과 양심’을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성격 또는 인간의 소유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억압적인 체제가 사람들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걸 봉쇄할 위험성이 있다. 그들이 이성을 적절하게 갖고 있지 않거나 그들의 양심이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기는 했지만, “이성과 양심”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성과 양심”이 비판자들이 여기는 것처럼 인권 소유의 존재론적 기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이성과 양심”을 사람이 인권을 가진다는 걸 알게 될 수 있는 인식장치, 인간의 능력으로 봤다.

또한 이 표현은 전문 두 번째 문단에 있는 “인류의 양심”과 연결된다. 전쟁과 홀로코스트는 인류의 양심에 반하는 것이고, 세계인권선언은 인류 양심의 표현이라고 봤다. 제 1조에서 인권에 대한 천명과 함께 인간의 의무를 포함하는 것이 균형을 이룬다고 봤다. 즉 “이성과 양심”은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장치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1조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했다. 이에 어떤 태어남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즉 ‘신체적 출생’이냐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인류 가족 속으로의 도덕적 출생’이냐 ‘법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이냐이다.

‘태어날 때부터’를 신체적 출생으로 본 입장에선 인간 생명의 출발점(가령 태아)을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표현을 반대했다. 출생의 ‘법적’ 성격을 강조한 입장에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과연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한가? 법 앞의 권리의 평등은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 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국가가 공표해야 가능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선언이 ‘태어날 때부터’를 채택하면서 취한 입장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불평등한 환경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선언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결코 도처에 존재해온 엄청난 불평등을 부인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내재된 고유한 권리를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선언에서 “태어난다”의 의미는 신체적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평등, 인권을 평등하게 누리는 것, 그에 동반된 의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언 전문과 1조에서 말하는 “태어나다(born)”, “고유한(inherent)”, “양도할 수 없는(inalienable)”은 서로 연관된다. 모든 인간 구성원은 ‘타고난 존엄성’을 가지며, 이것은 우리가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나 기관이 준 것이 아니기에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도 없다는 논리구성이다.

혁명적 항거의 권리(the right to rebellion)

원래 저항권을 하나의 독립된 권리조항으로 명시하자는 의견과 그럴 수 없다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저항권에 반대한 입장은 ‘저항권을 인정하게 되면 정부에 반대하는 봉기를 장려하는 꼴이 된다’, ‘남용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압제에 저항할 권리는 오직 기본적 인권과 자유가 체계적으로 박탈될 때인데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를 결정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결과적으로 ‘저항권을 규범 속에 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저항권을 옹호한 입장은 "그 누구도 저항권이 불안정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불합리가 너무 커서 대다수가 그것을 느낄 때까지는, 또한 그것이 수정돼야 할 필요성을 발견할 때까지는 작동하지 않는다"며 저항권에 대한 우려를 반박했다. 나아가 "저항권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표현한 것이다. 전제와 폭압에 맞선 저항의 권리를 언급하지 않고서 인권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바로 최근의 역사(나치로 인한 고통)가 저항의 필요성을 말해주지 않느냐, 파시즘에 대한 반대로서 정부에 반대할 권리가 규정돼야 한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적극적 반대의견을 개진한 미국과 영국의 기권 속에 ‘혁명적 저항의 권리’는 결과적으로 별도 조항이 아닌 전문 속에 언급되게 됐다.

세계인권선언과 한반도

1945년 유엔이 창설되고 이후 3년여 선언이 기초되었다. 같은 시기 식민지 조선은 독립을 했다. 그러나 국제적 냉전과 국내의 좌·우익 대립 속에서 분단과 함께 맞은 독립이었다. 선언이 기초되던 3년여 기간 동안 한반도는 소련군과 미군의 군정 아래 놓였고, 선언이 선포된 48년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정부가 수립됐다. 각각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 주장하며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한 가운데 1950년부터 3년여 동안 이어진 끔찍한 살육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분단과 대립 속의 남과 북에서 국가안보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사회적으로나 인권탄압을 정당화하는 구호였고, 경제성장도 마찬가지 구호로 악용돼왔다. 선언의 제정은 1948년 12월 10일인데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같은 해 12월 1일 제정돼 역시 60년을 맞았다.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여전히 틀어막으려 한다. 북한인권 문제는 오늘날 국제인권의 장에서나 국내정치에서나 뜨겁게 다뤄지고 있다.

선언에 담긴 평화와 인권에 대한 열망, 자유권과 사회권의 긴장이 담긴 권리 목록, 인권의 정치화를 둘러싼 논쟁 등 어느 하나도 우리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는 것들이다. 앞으로 30개 조항분석을 통해 이들 문제를 하나씩 생각해보자.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