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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①] 지금, 세계인권선언을 묻다


세계인권선언이 시작된 자리

모든 사람에겐 누가 어떤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고유한 인권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유한 인권’에는 도대체 무엇이 속하는 걸까?

세계인권선언(아래부터 선언)은 이 질문에 대답함과 동시에 실천을 약속한 선두적인 국제적 문서이다. 선언은 다른 이유 볼 것 없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인간에게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생각에 터를 잡았다. 선언을 만들고 합의함으로써 ‘국내법으로 못 박아 있어야만 권리가 될 수 있다’거나 ‘자국민의 인권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는 그 국가의 맘’이라는 주장은 한물간 것이 돼버렸고, 인권에 대한 존중이 만인과 모든 국가가 지켜야 할 국제규범이 됐다. 2차 대전이라는 참상의 극한을 경험한 인류는 인권을 증진해야만 세계평화가 수립될 수 있다는 교훈을 선언에 새겨 넣었다.

세계인권선언의 구성

선언은 전문과 30조로 구성돼 있다. 맨 앞의 2개 조항은 선언의 대전제가 된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평등을 공유한다는 점, 이러한 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다는 점, 따라서 인권은 어떤 이유로도 누구에게도 부정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3조부터 21조까지는 생명권, 공정한 재판, 언론의 자유, 프라이버시 등 시민·정치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22조부터 27조까지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노동권 등 인간 생활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측면을 다룬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28조에서 30조까지는 선언에서 열거된 권리의 향유를 위한 사회적 및 국제적 구조, 인권에 부합되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언급한다.

세계인권선언의 한계

한국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이라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 ‘보편(universal)'인권선언이다. 세계 공통의 보편적인 가치가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선언을 만들기 전에도, 만드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논쟁이다.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갖는 정치적·사회경제적·문화적 다양성이 충분히 고려될 수 없었던 한계 때문이다. 나치즘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선언을 기초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한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선언을 기초하고 채택할 당시 유엔회원국의 수는 58개국에 불과했고, 식민지 상태를 갓 벗어나거나 여전히 식민지로 매여 있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다수 인민은 선언에 의견을 내지 못했다.

또한 선언은 분명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선언은 2차 대전 후의 사회경제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권리, 교육권, 사회보장권 등 ‘새로운’ 권리를 반영하면서는 ‘급진’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극히 신중을 기했고, 여성의 권리나 가족생활에 관련된 내용에서는 보수적 사회기조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떠오르고 있는 인권의 문제들에서 보면 빠진 부분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오늘날 선언을 볼 때는 선언 이후의 변화와 함께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인권은 무엇인가 (“Human Rights Here and Now " />

▲ 인권은 무엇인가 (“Human Rights Here and Now" 책표지)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반응

선언에 대한 반응은 대조적이다. 선언의 의의를 깎아 내리거나 실용적인 입장에서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국제인권규범의 정립이라는 면에서 그 의의를 평가하고 발전시키려는 입장이 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대별해보면 아래와 같다.

<회의적 입장>
· 기껏해야 정부들에 대한 훈계 내지 권고에 지나지 않는다.
·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집단적 사회주의를 끼워 맞춘 이질적인 소망의 목록이다.
· ‘짖기만 하지 물지 않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즉 ‘이행과 실천’의 문제를 무시했기에 동의된 문서일 뿐이다.
· 인권을 외교정책의 도구 또는 새로운 지배와 개입의 도구로 써먹으려는 의도 아닌가.
· 국제관계에서 인권은 장식용이거나 눈속임 장치고, 국제관계는 냉정한 계산이다. 인권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국가내의 내부 투쟁과 개혁의 결과이지, 선언 등 국제규범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 인권침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적에 대해 어디까지나 주권의 고유한 문제일 뿐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강력하다.

<긍정적·희망적 입장>
· 인권 규범이 정교해졌다. 선언 이후 꾸준한 국제인권규범 만들기가 진행됐고, 규범 만들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행으로 나아가게 됐다. 이런 국제인권규범은 정부, 국제기구, 시민사회 ‘공통’의 대화기준이 됐다.
· 유엔 속에서 인권의 역할이 강화됐다. 인권기준의 발전 속에서 유엔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고, 93년 세계인권대회,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창설 등은 그 대표적 사례다.
· 자발적인 시민 결사, 지구적인 NGOs의 출현, 지구적인 매체의 등장 등은 국가행위에 초점을 두었던 선언 기초자들이 계산하지 못했던 바다.
· (장식용이든 정의로운 목적의 추구에서든) 인권은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인권사상에는 힘이 있다.
· 반식민지투쟁, 민주화투쟁,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등 억압에 맞선 역사적 투쟁이 인권을 통해 상징화됐다.
· 인도주의법과 반인류 범죄에 대한 것으로 인권의 영역이 확대됐다.
· 국가가 자국민을 다루는 방식이 정당한 국제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국제기준에 속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규범화한 것이 선언이다.
· 국제관계에 ‘인권’을 대입함으로써 지구적 관점 말고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사회와 관계의 건설에 이바지해왔다.
·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인권에서 유일한 영역이었던 시민·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적 권리도 포섭했다.
· 인권의 개인주의적 속성이 공동체적 속성을 통해 완화·축소됐다. 특히 29조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한다”가 그 예이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국제인권현실의 전개

선언 이후 60년의 세월 동안 국제인권은 쉼 없이 달려왔다. 그 전개 상황을 다소 숨차게 쫓아가보자.

· 50년대 냉전
선언 기초과정에서부터 드러난 냉전이 심화됐다. 선언은 보편적 인권의 개념과 목록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선언’에 머무른 것이었기에, 인권의 국제적 보호를 위한 법적 구속력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조약’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러나 사회권과 자유권이라는 두 범주의 권리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심각한 입장차이가 있었다. 규약 제정의 초기에는 하나의 조약을 목표로 작업을 벌였으나, 특히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의 요구로 두 개의 다른 조약을 추진하게 됐다. 선언은 하나인데 그에 근거한 국제규약은 두 개(‘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다. 양 규약의 채택과정은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60년대
새로 독립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의 등장으로 유엔인권활동에 새로운 물결이 일었다. 이들은 식민주의의 토대가 된 인종차별주의에 몰두했다. 65년 인종차별철폐협약이 채택됐고, 자기결정권과 반아파르트헤이트 관련 활동(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대대적 국제캠페인)이 강화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논란 끝에 66년 양대 규약이 채택됐으나 그 후 국제인권의 전개는 슬럼프를 맞게 된다. 기준설정에는 동의가 이뤄졌으나 이행으로 강조점이 넘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다. 국가주의, 주권존중 논리의 완강함 속에 인권은 국제적 토론에는 적합하지만 구체적인 국제행동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확인되는 시기였다.

·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까지
73년 칠레 아옌데 정권이 무력으로 전복됐다. 그 후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인권침해에 대한 혐오감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됐다. 대규모 인권침해자를 다루는 유엔워킹그룹이 창설됐고, 칠레의 선례에 기초해 특정 국가의 인권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대표와 특별보고관이 임명됐다. 75년 헬싱키 협약에서 인권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76년 유엔시민·정치적 권리규약에 관한 자유권위원회의 새로운 모니터링 제도가 등장했다. 77년 지미카터의 등장으로 ‘인권외교정책’이 화두가 됐다. 여성차별철폐협약, 고문방지협약, 아동권리협약 등 주요국제인권법이 속속 제정됐다. 특정 유형의 인권침해를 지구적으로 다루기 위한 시도가 시작됐다. 80년 강요된 실종에 관한 워킹그룹 창설, 82년 자의적 처형에 관한 특별보고관 임명, 85년 고문에 관한 특별보고관 임명 등이 그것이다. 이시기 NGOs의 국제인권활동이 급증했으며 77년 국제앰네스티의 노벨상 수상은 그 상징적 사례다.

· 90년대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국제사회가 관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됐다. 91년과 94년에 구 유고와 르완다에 대한 특별법정이 열렸고, 95년 유엔총회는 국제형사법정을 창설할 것을 결정했다. 포스트 냉전시대를 맞아 냉전 이후 국제질서를 어떻게 짤 것인가를 논의하는 일련의 국제대회가 꼬리를 물었다. 93년의 비엔나세계인권대회, 94년의 북경여성대회 등이 그것이다. 94년 UNDP의 인간발전보고서는 ‘인간안보’의 구체적 내용을 드러냈다.

· 2000년대
반세계화운동이 주목받게 됐다. 물에 대한 권리, 기후 변화 등 생태와 인권 문제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강화됐다. 9·11 이후 테러리즘과 인권 문제가 위기를 불렀고, 93년 이라크침공에 맞선 국제평화운동이 전개됐다. 평화·안보·인도주의적 위기에 대한 인권의 침투와는 달리 경제나 금융기구에 대해서는 인권규범이 침투 못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인권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