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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의 인권이야기] 열정씨의 운수 좋은 날

2월의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어깨를 짓누른다. 바람 끝이 차고 습한 걸 보니 눈이라도 한바탕 몰아칠 기세다.

“오늘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말이에요.”

열정 씨는 시동을 켜면서 뒷좌석에 앉은 방씨 아저씨를 향해 구원의 대답이라도 얻으려는 듯 말을 건넨다.

“오늘 또 데모가? 일하는 날이면서?”
“일 하면서도 하는 거죠. 한미 FTA도 큰 일이구요. 오늘은 국방부 앞에서 농성도 있어요. 에스피아이(SPI)라구 한대요. 미국하고 한국 정부하고 지들끼리 모여서 평택에 미군기지 만들고 6천억원이 넘는 세금 거저 주고 받는 그런 회의를 한대서 항의집회를 해요. 아저씨도 그놈들 하는 짓 잘 아시잖아요. 저야 점심시간에 잠깐 들르는 거지만 하루 종일 집회해야 하는데, 눈발이라도 날리면 거기 계신 분들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안 그래요, 아저씨? 허허”
“그러면서 나는 뭐 하러 병원까지 데려다 준다고 해,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이렇게 신세가 많아서…….”

열정씨는 방씨 아저씨와 같은 골목에 살고 있다. 봉천동 오르막길을 오가면서 알게 된 인연이 이제 10년이 넘는다. 방씨는 한국전쟁 때 강제징집돼 한국노무단으로 미군부대에서 평생을 일했다. 한국노무단은 노동자라고 하지만 공병, 병참, 탄약·포탄 검열 등 주로 군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방씨 아저씨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군부대에서 포탄 검열 일을 해왔는데 폭발사고가 일어나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되었다. 목숨을 잃은 동료들도 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은 것이 나이가 들자 목발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몸이 되었다.

“아저씨도 평생 군인으로 산 거나 다름없는데, 연금이 나오길 하나 국가유공자들처럼 집을 무료로 빌려주길 하나, 그래도 미국에선 인건비가 없다고 방위비분담금을 더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고 있으니. 미군 한 명 더 들어오는 거 하구 한국사람 한 명 고용하는 거 하구는 하는 일은 똑같아도 인건비가 비교도 안 되게 싸다는데…….”

방씨 아저씨의 속마음을 대변하듯 말을 이어가던 열정씨는 백미러 너머로 그의 반응을 살핀다. 군복 안으로 앙상하게 뻗어 있는 다리를 천천히 주무르고 있는 방씨 아저씨의 거칠고 주름진 손이 열정씨의 눈 가득 들어온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 국방부 앞으로 막 출발하려는 열정씨의 택시에 중년을 훨씬 넘긴 한 남자가 거칠게 올라탄다.

“국방부로 빨리”

점심시간 집회에는 참석하려고 더 이상 손님을 안 태우려 했던 열정씨는 국방부라는 말에 반갑다.

“급하신가 봅니다. 마침 저도 그쪽으로 가던 참인데 잘 됐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도록 하시오.”

명령조로 말하는 손님이 순간 거슬렸지만 백미러로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속도를 높였다.

“이 자식들이 빠져가지고, 차량도 제 시간에 대령 못하고! 점심식사에는 참석해야 하는데. 이봐요. 얼마나 걸리지?”
“늘 다니시던 길일텐데요. 조금만 참으세요, 손님.”

시청 앞 신호에서 손님을 나무라던 열정씨 앞으로 갑자기 피켓과 깃발을 든 시위대 수백명이 몰려든다. ‘NO FTA’의 물결이 삽시간 거리를 메운다.

“이런! 빨갱이 새끼들이 미쳤어, 어이 기사. 빨리 차 돌려서 빠져나가. 이러구 있지 말고. 나 오늘 국방부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단 말이야!”

열정씨의 택시는 시위대로 둘러 싸였다.

“한미 FTA 저지하자”
“한미 FTA 중단하라”

시위대가 뿌린 유인물이 공중을 새처럼 날아 오르다 열정씨의 택시 유리창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안절부절 못하고 핸드폰을 눌러대는 손님에게 열정씨는 유리창에 붙어 있는 유인물 한 장을 건넨다.

“손님 이 사람들은 빨갱이가 아닙니다. 한미 FTA가 잘못됐다는 걸 알리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여기 이거 한 번 읽어보세요. FTA 체결되면, 우리나라 사람들 IMF 때보다 더 힘들다고 잘 설명되어 있어요. 국방부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거 알아야 합니다.”

그 손님은 거칠게 열정씨를 노려보면서 그새 연결된 핸드폰에 대고 악을 쓴다.

“야 이 ×새끼야! 너 때문에 오늘 작살났어. 지금 시청 앞 교통상황 빨리 보고해!”

고함치는 그에게 열정씨도 화가 났던지 억지로 유인물을 쥐어 주는데 순간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시위대는 삽시간에 소공동 쪽으로 빠져 나갔고 열정씨 앞 도로가 훤히 뚫렸다. 아직도 핸드폰에 대고 악을 쓰는 손님을 태우고 열정씨는 빠르게 국방부를 향해 내달린다.

“손님은 저를 아실 리 없겠지만,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평택에서 봤죠. 대추리에서요. 미군기지 만들려고 여념이 없으십디다.”

갑작스런 열정씨의 이야기에 놀란 남성은 말을 더듬으며 제대로 응수하지 못한다.

“거기뿐이 아니더군요. 제가 군산에 가서도 미군기지 반대 집회를 했는데 거기에도 나와서 미군 앞잡이 노릇을 하더군요. 군산미군기지에 저장되어 있는 탄약이 혹시 미국이 버리는 쓰레기 탄약 아닙니까? 듣자하니 6십만톤이나 되는 못쓰는 탄약을 미국이 2008년까지 다 폐기처분하려고 한다는데, 그걸 사들이는 비용이 방위비분담금의 군수지원비라고 하더군요.”
“당신 그런 국가기밀 어떻게 알았어? 이거 진짜 빨갱이잖아. 빨리 차 세워!”
“안 그래도 더 이상 갈 생각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에스피아인가 한미안보정책구상인가 하는 비밀회의를 한다고 해서 반대 집회에 왔는데 당신이 거길 가려고 악을 쓰면서 왔군요. 어서 내려서 들어가 보시죠.”

열정씨는 한미안보정책구상에 반대하는 농성단이 한창 집회를 하고 있는 국방부 앞에 차를 세웠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손님을 내버려둔 채 열정씨는 차 트렁크를 열어 준비한 피켓을 꺼내 들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 성큼 걸어간다. 그 뒤 그 손님은 국방부 안으로 줄행랑을 친다.

지난 2월 8일 국방부 앞에서는 한미안보정책구상에 반대하는 하루 농성에 참여했습니다. 평택미군기지확장과 방위비분담금 등 불평등한 한미군사동맹에 대해 미국과 한국 정부가 모여 밀실회의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세욱 열사가 그 농성에 참여해 피켓시위를 했다는 것을 열사가 분신하고 난 후에 알았습니다. 이 글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방위비분담금 문제를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허세욱 열사를 주인공 삼아 만들어 낸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2월 8일 SPI에 반대하며 국방부 앞 하루 농성에 참여했던 허세욱 열사 <출처;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홈페이지>

▲ 지난 2월 8일 SPI에 반대하며 국방부 앞 하루 농성에 참여했던 허세욱 열사 <출처;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