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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의 인권이야기] 착취의 기술, 진화하는

지난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이 있었다. 금융채무자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고 있는 ‘파산·면책’ 제도 운용의 보수화를 규탄하는 자리였다. 올 2월 1일을 시작으로 서울중앙지법을 비롯한 지방법원들은 사기 파산자들을 가려낸다는 명목으로, 개인워크아웃과 같은 채무 변제 프로그램 이용을 종용하거나 채무액이 적다고 판단될 경우 접수를 받지 않는 등의 ‘내부업무처리방침’을 정해 시행하고 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채무자들은 자신의 수입과 재산을 채무변제에 전부 소진한 후 극도의 빈곤 상태에서 파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볼 때, 위 방침들은 채무자들의 유일한 탈출구마저 봉쇄하는 비참함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도 이러한 우려는 변제 가능성이 없는 이에 대해 젊다든지 장남이 아니라서 부모를 부양할 책임이 없다든지 하는 구차한 이유를 들어 면책을 기각하거나 보정 명령을 내리는 등의 사례로 현실화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법원 방침의 배경에는 브로커들과 짜고 사기 파산을 일삼아온 고법원장 출신 변호사 사건이 있음을 상기하면, 말 그대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꼴이다. 문제가 된 변호사는 부당이익금을 징수하고 집행을 유예하는 것으로 사건에서 해방되었으나,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400만명에 달하는 금융채무자들의 몫이 되었다.

법원의 파산면책 기각 보정 남발에 따른 금융채무자들의 전국동시다발 기자회견 모습 <출처; 금융채무사회책임연석회의>

▲ 법원의 파산면책 기각 보정 남발에 따른 금융채무자들의 전국동시다발 기자회견 모습 <출처; 금융채무사회책임연석회의>


금융채무자들의 80%가 100만원 이하의 소득으로 더부살이나 월세에 살고 있다는 통계에서 드러나듯, 금융기관들의 고수익, 고위험, 공격적 영업 전략은 새로운 빈곤의 지형도를 창출했다. 금융채무로 인해 빈곤해지고, 빈곤하기 때문에 금융채무로 유인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당연히 극단의 빈곤을 달리고 있는 노숙 생활자 역시 그러하다. 노숙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의 60%는 금융채무자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모든 금융채무자들이 그러하듯, 현재의 빈곤과 채무라는 미래에 대한 저당 앞에서 노숙 생활자들은 절망하고 있다. 특히 더 억울하고 잔인한 것은 채무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지도 않은, 소위 명의도용 사기 피해이다.

염전이나 김 양식장에 취업을 미끼로 유인한 후 강제 노역을 시키는 수법은 유명하다. 또한 보호를 명목으로 환심을 사거나 정신 장애가 있는 이들을 감금하다시피 하여 복지 수급액을 착취하는 일들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사례는 시선이 닿지 않는 어떤 곳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일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가장 빈번하고 후과가 큰 것은 노숙 생활자들의 명의를 이용한 착취 행태들로, 노숙생활자들 넷 중 한 명은 이러한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통적 수법의 착취는 노숙 생활자들의 인적 자원 수탈에 한정되지만, 신용산업 구조와 결합한 명의도용을 통한 착취는 그 부가가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최씨 아저씨의 경우만 보더라도 명의도용으로 인한 체납세금만 무려 11억원이다. 속칭 바지사장으로 이용당해 그의 명의로 세 개의 회사가 차려진 것인데, 세금이 11억원이라면 범죄자 일당들이 편취한 이익금은 도대체 얼마란 말인가?

노숙생활자를 이용하여 금융사기를 벌이려는 일당들은 노숙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미끼를 던진다. 그들은 노숙 생활자들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현금을 대가로 흥정을 붙이고, 미래에 대한 예측보다는 현실 문제의 해결이 급한 노숙생활자들의 적지 않은 수는 이에 응하게 된다. 그 후 범죄자 일당들은 현란한 솜씨를 발휘한다. 노숙생활자의 명의로 대포폰을 뽑아 국제전화방으로 이용하거나, 대포차를 만들어 팔아치우고, 회사 설립 후 가맹점을 등록하여 영업이익을 내고 탈세를 하는 등 그 수법은 이해하기도,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이로 인한 피해액은 기본이 수천에서 수억, 수십억원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하며, 게다가 사기 범죄자 일당들이 약속한 대가를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이렇게 명의 대여를 유도하는 수법도 있지만 명의를 훔쳐 도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노숙 생활자들은 가방을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는 경험이 유달리 많은데, 그들은 대부분 가방 하나에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 등 모든 짐들을 간추리고 있어 도난과 동시에 명의도용 피해를 입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또 약물이 든 음식물을 먹여 몸과 정신을 가눌 수 없게 한 후 명의를 도용하는 방법, 신용산업에 대한 무지를 이용해 저소득층을 위한 대출 프로그램인양 오해하도록 한 후 도용하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들이 발견되고 있다.

위와 같은 피해에 노출된 노숙 생활자들은 다시 일어설 의지를 돋우기가 쉽지 않다. 애써 힘을 낸다 하더라도 이미 범죄자 일당들은 대포폰이나 대포차, 바지사장, 대행사와 같은 세탁 기제들을 통해 신분을 철저히 감추기 때문에 피해사실을 입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역시 가장 효과적인 것은 예방이다. 경찰은 납부 능력도 없는 노숙 생활자들에게 범칙금 납부 고지서 따위나 발부하는 데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범죄라는 치안에 대한 정면도전 앞에 분노해야 한다. 지자체 역시 기초질서 운운하며 노숙 단속 순찰대를 편성하고 그들에게 쓸데 없는 월급을 주느라 연간 수억원씩 뿌려대는 헛수고를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노숙 생활자들과 조금이나마 삶을 포개다보면 그들은 자본의 찌꺼기들을 강요당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노숙 생활자에 대한 신종 착취 수법들은 비단 일군의 범죄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어되지 않는 금융과 신용산업의 그늘이며 그들과 범죄 집단과의 공명으로 빚어지는 일들이다. 이런 그늘은 노숙 생활자나 금융채무자들에게만 드리워지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같은 각도, 같은 방식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러한 착취 구조 속에서 자유로운 이들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