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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사건과 강남역 살인사건

문서 더미의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당장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에게서 ‘배제’라던가 ‘분리’라던가 하는 단어의 부당함을 감히 두려울 정도로 체감하게 된 것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태 조사를 하러 다니면서였다.

70-80년대 국내 최대 규모의 부랑인임시보호소였던 형제복지원에서는 부랑인에 대한 구제책으로 종교 선도와 숙식제공, 직업재활교육이 행해지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7년 3월 22일, 탈출을 시도하던 원생 1명이 직원의 구타로 숨지고, 이에 수용자 35명이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내부의 참상과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형제복지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이사장 박인근 집안의 재산 증식을 위한 중노동에 동원되는 것은 물론, 구타와 감금, 성폭행 등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2년간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무려 513명에 달하고, 이들은 야산에 암매장 되거나 해부용 시신으로 팔려나가기도 한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그 집계란 기록이 남아있는 한에서의 이야기이므로 실제 피해는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기이하고 궁금했던 것은 의외로 ‘부랑인’이라는 말이었다. 생존자 분들 중 어느 누구도 당시 자신이 ‘부랑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피해자 대다수는 ‘부랑인’ 시설에 감금된 채 폭력과 억압으로 인생의 한 시기를 도륙질 당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부랑인- 경제 성장기, 표준 노동력에 미달하는 가난한 존재들에 대한 혐오

실제로 이 사건은 87년 조사 당시 “부랑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도 납치되어 ‘부랑인’이라는 낙인과 거의 처벌 수준에 가까운 폭력으로 고통을 받았다”는 데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부랑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존하는 누군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당시 독재 정권들이 자신의 부당한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벌였던 이른 바 <사회정화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포획 가능했고 그에 따라 엉뚱한 피해자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달 수 있다.

‘부랑인’이라고 쉽게 낙인찍혔던 피해자들 대부분은 극빈곤층, 가족이 없거나 길을 잃은 어린 아이(혹은 청소년), 장애인 등 완력 앞에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렵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딱히 호소할 데가 없는 사회적 연계망이 약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 면에서 당시 누군가를 ‘부랑인’으로 인식하는 행위는 전형적인 약자 혐오, 나아가 약자 청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시기 제노사이드의 심리는 보다 면밀하게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70-80년대가 민중저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시기이니만큼, 이러한 시각은 동일한 시대의 전혀 다른 결을 들추어내는 작업이 될 것이므로 매우 중요하고도 조심스럽다.

우선, 70-80년대 당시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사회복지시설의 역사에는 분명 정권이 주도하고 사회 전반이 동의한 “분리와 배제의 논리”가 광범위하게 작동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 급증한 장애인이나 부랑인 수용 사회복지시설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에서 건강하고 온당하게 여겨지는 “표준 노동력1”로 계산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독재 권력과 표준 노동력1에 미달하는 존재. 그 사이에서 사회는 독재정권에게 물어야 할 정당성 대신 엉뚱한 이들에게 정당성을 묻고 있던 것은 아닐까? 가령 7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의 궤도를 따라 모두들 가난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현실 속에서, 넝마주이, 껌팔이, 구두닦이 등(당시 부랑인으로 분류되었던 대표적인 직업군이다.) 노동을 하더라도 변변찮아 그 가난을 죄업으로 안고 있는 그들, 혹은 중증장애인처럼 아예 노동시장에서 배제되어 가난을 벗어날 가능성마저 없는 그들이야말로 선진사회로 가는 길목의 훼방꾼이며 사회 불순요소라는 인식으로 말이다.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이 부당한 권력의 횡포가 아니라 사회 발전에 정당한 노동력이 되지 못하는 ‘부랑인’때문이라는 낙인찍기 속에서 당시 ‘부랑인’이라는 개념에 포획된 사회의 다양한 약자들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저마다의 사연들은 무시된 채 일괄 처벌개념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약자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그들이 처한 구조적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사회 윤리 대신 이러한 심리적 처벌과 실제적인 배제가 통용되는 사회라면, 이것은 대체 파시즘과 무엇이 다른가? 형제복지원 사건이 내게 던진 성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섬뜩한 인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음의 질문도 가능해진다. ‘부랑인’이 모호한 개념어였기 때문에 엉뚱한 피해자들이 속출해서가 아니라 설령 실존하는 누군가를 적확하게 지칭하는 말이었어도,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침해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어떤 이의 인권은 온전히 지켜져야 하고, 다른 이의 인권은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그럴만한 판단 기준과 권리가 과연 우리 자신에게는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과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현재 거의 당연시되거나 기껏해야 ‘어쩔 수 없다’라는 논리로 포섭되곤 하는, 중증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 특히 정신장애인들의 시설 강제수용 문제에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한 성격 규정 논박과 경찰과 정부, 주류 언론의 보도 태도와 연관 지어 본다면, 벌써 30년 전인 형제복지원 사건이 던진 저 질문은 우리 사회에서 조그마한 해답의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질문으로서만 허공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확실히 쓰디 쓴 입맛을 다시게 되는 요즘이기는 하지만.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에 대한 정부 대책은 정신장애인을 범죄자로 모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긴급집담회가 열렸다.

▲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에 대한 정부 대책은 정신장애인을 범죄자로 모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긴급집담회가 열렸다.


여성 혐오와 정신장애인 혐오- 동시대 약자 혐오는 어떻게 은폐되고 어떻게 이용되는가?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성격 규정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정신병력이 있는 피의자와 일면식도 없는 여성 피해자. 방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의견은 갈리는 듯 했다. ‘일면식도 없는’에 방점을 두면 사건은 ‘묻지마 범죄’로 여겨지고, ‘여성 피해자’에 방점을 두면 같은 사건은 곧 ‘여성 혐오 범죄’로 회자되었다.

사실 사건의 성격이 한 가지일 수는 없다. 당대 사회를 수면으로 놓고 보자면, 당대의 사건이라 불리는 사안들은 그 수면의 심층부터 쌓여온 문제들이 솟아오른 거대한 빙산의 일각이다. 그만큼 복잡하다. 그러므로 ‘묻지마 범죄’와 ‘여성혐오 범죄’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문항이 아니라, 실은 둘 다 혹은 그 이외의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도 숙고해야 할 동시적인 문항이다.

그런 면에서 이 사건 직후 수많은 여성들이 피해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피해를 또 다른 여성인 나 자신의 문제로 동일시하는 현상은 주목해야 한다. 빙산의 일각으로 솟아오른 ‘한 여성의 죽음’ 이면에 수면의 심층부터 쌓여온 ‘모든 여성’의 죽음과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묻지마 범죄’라는 규정도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묻지마 범죄’라는 규정이, ‘아직 살아있는(이 표현은 쓰고 싶진 않지만 이 표현이 제일 적절하다.)’ 여성들의 공감에 힘입은 ‘여성혐오 범죄’라는 규정과 여성 혐오의 일상적 기류들을 부인하는 기재로써 대표성을 띤 언어로 선택될 때, 그것은 틀린 것이 된다. 이 사건의 사회적 의미 자체가 절단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공식 발표한 경찰의 입장은 기존의 사전적 정의에 의거했다고는 말하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사건이 던진 파문, 즉 변화된 사회 내 문제의식과 정서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구태라는 평가를 면치 못한다. ‘묻지마 범죄’이지만 ‘여성혐오 범죄’는 아니라고 못 박음으로써 선택적 문항의 오류, 즉 하나를 택하는 순간 다른 하나를 은폐해버리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의자의 ‘정신병력’에 초점이 맞춰지는 규정 역시 위험하다. 사건이 피의자 한 개인의 돌출행동으로 마무리 지어지고, 피해자 역시 어쩌다 변을 당한, 단지 운수가 사나웠을 뿐인, 무고한 사람으로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 아래에서는 피의자도 피해자도 그 사회적 맥락을 잃어버린다. 피의자가 왜 여성을 표적으로 삼았는지, 그것이 개인적인 성향에 의한 것인지 사회적인 영향에 의한 것인지, 개인적인 성향이라면 여기서 그의 병력은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지, 정신병에 의한 범죄인지 정신병력을 지닌 한 개인의 범죄인지, 여성은 왜 늦게 다니거나 화장실조차 마음 놓고 쓸 수 없는 사회인지, 그것이 비단 화장실의 구조나 늦은 귀가에 대한 개인의 책임 문제인지, 마땅히 생각해 볼만한 세분화된 질문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일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마지막 규정이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사는, 따라서 불운이 존재할 수 없는 ‘일상’적인 공간에서는,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안도 속으로 우리들은 쉽게 숨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정상적이지 않은 피의자도, 불운한 피해자도, 모두 ‘우리’ 밖에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대책은 단순하게 고안된다. 정신병력이 있는, 곧 ‘정상적이지 않은 피의자’와 ‘잠재적인 피의자’들을 축출하자! 그것으로 ‘살해’라는 지극히 우연적인 선택적 불운을, 피해자와는 달리 우리는,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강신명 경찰청장의 발표는 전적으로 이와 같은 사고방식의 산물이랄 수 있다. 이번 사건을 피의자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로 선을 그어버림으로써 “사회 안전을 위해 앞으로 정신질환자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초점을 맞춰 서슴없이 “정신질환자의 위험도를 구분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일선 경찰에 배포하고, 경찰이 행정입원을 조치할 수 있게 하며, 당사자가 퇴원을 원해도 병원이 이를 거부하는 조치”까지 적극 검토하겠다고 발표했으니 말이다. 정신장애인들은 벌써 위험군, 잠재적 피의자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들은 과거 ‘부랑인’을 위험과 혐오 인자로 지목해서 일상에서 축출해 내었던 것처럼 점차 ‘정신장애인’을 위험과 혐오 인자로 구분해 일상에서 도려내야 우리가 안전하다고 말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제 입원을 통해서라도 속히 치료를 유도하는 것이 ‘정신장애인 당사자’를 위한 길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지목하는 순간, 그 누군가들은 ‘우리’에서 ‘그들’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지목된 누군가를 계속 치워버려야만 지켜지는 안전은 과연 안전일까? ‘그들’의 이질성을 적이나 불순요소로 간주해 끊임없이 제거해 나가는 사회란 그저 동질 집단일 뿐이지 정녕 다양성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 사회일 수 있을까?
이런 사회에서 ‘나’는 언제까지나 안전하게 ‘우리’의 일원일 수 있을까?

대체 어디서부터 이 사태의 대안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시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부랑인’이라는 말이 담당하던 배제와 분리 지표를 이제 ‘정신장애인’이라는 새 이름이 대체하려는 것은 아닐까,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길목에서 바야흐로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임을 퍼뜩 자각한다.


덧붙이는 이야기

내밀한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우리 셋째 삼촌 이야기이다. 살아계신 셋째 삼촌 말고, 원래 셋째 삼촌. 일찍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은 넷째 삼촌을 셋째로 올려서 부르는 거라고 했다. 좀 야박하지 않나 싶긴 했다. 자식이나 형제의 망실을 받아들이는 방법 치곤 죽은 이에 대한 기억, 아니 그 존재 자체를 아예 소거해 버리는 듯해… 그래도 차마 직면할 수 없는 구멍을 메우기 위한 그 나름의 아픔의 표출인 거라고 애써 생각해 왔다.

셋째 삼촌은 천안 부근에서 변사했다. 갓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이었던 삼촌은 전쟁 통에 그만 넋을 놓아버렸다는데, 전쟁 직후엔 서울 모 정신 병원에 보내졌다고 들었다. 그런데 천안 어디메쯤, 길 위에서 탈진해 죽었다. 스무 살을 넘겼을까 마저 다 살지 못했을까. 치료를 위한 것이었는지 격리를 위한 것이었는지 솔직히 누굴 위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나, 삼촌은 잠자코 입원해 들어앉았던 병원이 아니라 길 위에서 죽었다. 퇴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의지로, 걸어서 걸어서 아마 집을 찾아오고 있었을 거라고, 변변한 입성 하나 갖춰 입지 못한 채 변사한 동생의 시신을 거둬온 큰아버지가 그것도 돌아가실 즈음에서야 겨우 한 말씀을 남기셨다. 우리 집에서 셋째 삼촌, 아니 셋째라는 순번조차 박탈당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그는 우리 집의 빗금 쳐진 역사다. 봉인된 기억이다. 그런데 왜?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막내였던 내 아버지는 다른 형들처럼 학교도 가지 않고 가끔씩 혼자서 크게 웃거나 크게 놀라거나 하던 셋째 형이 그래도 학교 다니는 다른 형들처럼 훈육을 핑계로 툭하면 때리지는 않았다고 술회한다. 그럼에도 그가 더 이상 집에 머무르지 못하고 폐쇄정신병동에 입원해야했던 것은 아직 어린 막내의 안전과 교육 때문이었다고… 들을수록 참, 이상한 술회…….
그는 무언가를 행하기도 전에 먼저 ‘위험’을 판단 받았고, ‘격리’로 처벌받았다. 그저 걸어서 밖에는 올 수 없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는 가족들에게 무슨 항변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의 봉인은 사실 우리 가족들의 과오를 봉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진심으로, 우리 사회는,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서 부연하자면, 무려 30년이 지난 이 사건만 해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발의되었던 특별법은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이는 ‘부랑인’이라는 상상적 개념이자 지금도 여전한 사회적 낙인이, 어디까지나 ‘그들’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로 받아 안기에는 저어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사회 심리적 거리를 유발함을 반증한다. 그래서 혐오는 무서운 것이다. 설령 그것이 허상임을 알아도 감정적으로는 점점 더 견고하게 시간과 함께 퇴적한다.

그럼에도 이 사건에서 뚜렷한 진일보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당사자들의 목소리에서이다. 87년의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쏟아진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이들은 여전히 ‘피해대상자’였다. 종래의 시설 문제 고발이 시설 운영자의 부정부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반면, 형제복지원 사건 보도는 비로소 수용자들의 인권 유린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지만, 수용자들의 목소리는 기자나 검사, 사회복지와 법률 전문가들의 조사와 발표에 의해서 전해졌을 뿐이다. 따라서 형제복지원에 대한 당시의 공분과 법률적 제제는 수용자들의 희망사항이나 목소리를 대변했다기 보다는, 제 3자를 매개로 하는, 심하게 말하면 당대 현실과의 미적지근한 타협안에 머물렀을 수도 있다. 그러던 것이 지난 2012년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인 한종선 씨의 <살아남은 아이> 출간과 더불어 이 사건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 동안 간헐적으로 국가부처기관에 들어오던 형제복지원 관련 증언과 민원들을 포함해 다수의 피해생존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하나의 구심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보다 여러 명의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증언에 참여한 구술기록집 <숫자가 된 사람들>의 출간도 같은 맥락에 있다. 87년 조사 당시만 해도 여전히 피해“대상자”에 불과했던 피해자들은, 이제 피해“당사자”로서 자신들이 경험한 폭력의 실체를 증언하면서 순전한 자신들의 목소리로 전면적인 사건 재조사와 엄중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이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분리되었던 ‘그들’에서 엄연한 ‘우리’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존재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번 사건과 관련해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덧붙임

서중원 님은 형제복지원 구술기록 프로젝트에 참여해 <숫자가 된 사람들>을 함께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