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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의 인권이야기] 은미와 희주가 ‘노숙’을 물려받지 않기를

백일 때였을까, 돌 때였을까? 흙벽집의 먼지 뽀얀 마루에 앉아 머리통만한 배를 꼭 쥐고 찍은 것이 내 유일한 유아기적 사진이다. 나름대로 신경 쓴 사진이라고 생각하지만, 남의 집에서 앨범을 구경할 때 구색을 갖춰 찍은 돌 사진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적잖이 위축되는 게 사실이다. 단지 사진 한 장으로 되돌아보게 되는 기억이지만, 당시의 집안 사정을 그만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흔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빠와 함께 동반 노숙을 하던 은미의 생일잔치

몇 달 전 은미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다시 서울로 올라왔노라고. 서울을 뜬지 만 3년은 지난 것 같은데, 역 앞에서 나를 알만한 아저씨들한테 몇 번이나 바뀐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를 주신 것이다. 은미, 은미 동생 동철이, 은미 아빠 셋이 사는 은미네는 기초생활보장수급 가정이다. 은미 아빠는 몇 마디 안부 인사를 나누자 금새 궁금증을 풀어 놓으신다. “수급자 법이 많이 바뀌었나보네요. 서울 오니 한 달에 20만원 밖에 안 나와요” 동철이를 처음 본 게 백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니, 동철이는 현재 미취학 상태라서 은미네 집은 3인 가족 최저생계비 전액이 나와야한다. 은미 아빠 말이 사실이라면 동사무소에서 부당한 추정소득을 부과한 게 분명하다.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어보니, 역시 그 이유다. 그렇게 은미 아빠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지난 주 은미의 열번째 생일잔치에 초대받게 되었다. 은미가 아빠 등에 업혀 노숙을 시작하게 된 건 갓 돌이 지났을 즈음이라 한다. 그렇게 은미는 역을 놀이터 삼고, 역에 계신 아저씨들을 ‘삼촌’이라 부르며 자라게 되었다. 동생 동철이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몸을 풀 때만 잠시 여인숙에 있었지 아빠를 따라 노숙을 경험하며 지금까지 커왔다.

딸의 생일에 은미 아빠는 전을 부치고, 과일을 사오고, 비록 인스턴트지만 해물탕을 끓여 내왔다. 들고 간 생일 케이크를 중간에 내놓자 여인숙을 개조한 쪽방이지만 제법 생일 분위기가 난다. 손님은 아빠의 친구들이다. 젖먹이 아이와 배 속에 또 한 아이를 가졌다는 젊은 부부, 그날 처음 본 고등학교 1학년생 희주와 부모님, 그리고 나. 손님들의 수는 적지 않았지만 정작 은미의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친구들을 초대하기엔 자기 집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빠가 만류한 건지, 친구를 초대한다는 생각을 하기엔 은미가 아직 너무 어린 건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은미 아빠는 은미가 학교와 공부방도 잘 다니고 어린 동철이도 제법 잘 돌보니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하신다. 사실 아이들과 떨어지기 싫어 시작한 동반 노숙이지만, 제 아이가 한 데서 뒹굴고 잠드는 모습을 보는 아빠의 마음이 어디 성했겠는가. 아동학대로 신고도 많이 당했고, 파출소에 가서 싸우기도 많이 했다 한다. 이날, 그만한 처지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손님들과 함께 은미의 생일잔치는 조촐했지만 진지했다.

‘노숙 가족’에서 ‘철거민’이 된 희주네

집에 가는 길, 희주네 식구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가다보니 어찌하다 결국 희주네 집에도 가게 되었다. 공사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 파헤쳐놓은 언덕길을 오르니 비로소 희주네 집이 나타난다. 예전 신문을 돌릴 때 내 구역이었던 동네다. 미끄러운 골목길에서 자빠져 오토바이 밑에 깔린 기억이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초등학교 때 썼던 기억이 있는 큰 연탄난로가 보인다. 연탄가스 사고가 걱정돼 이걸 집 안에서 피워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연통 막음 처리가 정말 꼼꼼하다. 습기로 벽지가 붕붕 떠 있고 난로가 난방 장치의 전부지만, 방 2개와 거실 겸 부엌, 화장실을 갖춘, 연탄난로가 운치 있는 집이다. 희주 아빠는 “애가 공부를 못 따라가서 학교를 멀리 갈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집세가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원이었는데, 습기 많고 곰팡이 피는 문제를 불평했더니 10만원으로 깎아 주더라. 가구와 컴퓨터는 다 돌아다니면서 주워서 설치한 거다.”와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희주 아빠는 IMF 초창기 거리로 나오게 되면서 정신지체 장애인의 몸으로 노숙하고 있던 희주 엄마와 어린 희주를 만나 한 가족이 되었다. 그때 언론도 많이 탔다고 한다. 당시 노숙인들은 경제 위기의 대명사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노숙은 분명 훌륭한 그림이었을테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은미네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분리시키려는 정부와 경찰의 시도, 그를 피하려는 다툼과 피신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꾸려진 가정은 10년을 이어왔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그 꼬마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다.

지금 희주네는 이삿짐을 싸고 있다. 재개발로 인해 5월까지는 집을 비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수년 간 살아온 동네를 떠나야하는 데다, 월세 10만 원에 방 두 개, 거실 겸 부엌이 딸린 집을 찾아야한다. 거리에서 힘겹게 ‘집’으로 이주했지만 이제는 ‘철거민’이라는 신분을 더해 또다시 ‘집’을 고민해야 한다.

빈곤이 은미와 희주에게로 대를 잇게 되지는 않을지

은미와 희주에게도 백일, 돌 사진이 없다. 대신 벽에 붙어있는, ‘서울역’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서 그 아이들의 어릴 적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아이들은 노숙에 대한 기억, 그리고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고 가난하기만 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여느 아이들과 같은 준비도 없이, 부모 때 보다 더 서슬 퍼런 사회로 나가게 되는 한 빈곤은 대를 잇게 되지는 않을지.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부모 역시 가슴 한 편으론 이런 고민들을 쌓아갈 것이다. 은미, 희주와 부모들에게는 적당한 ‘말’이 아니라, 그들이 숨 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행동’이 적절한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아이들은 점점 자라서 성인이 되어 가나 사회는 아직 그들을 초대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현실, 이것이 고민의 핵심이다.
덧붙임

이동현님은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