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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나의 인권이야기] 권위를 벗고 아이들과 마주보기

활동 햇수가 더해가고, 고민하며 겪어온 날들이 쌓여갈수록 공부방 일이, 내 삶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그 만큼 수월해지리라 기대했나 봅니다. 어제보다 무언가 좀더 능숙해진 듯하고, 사람이든 일이든 더 여유로이 대하게 되었다는 느낌도 있지만, 해마다 날마다 떠오르는 고민들이 새롭고 나는 내 기대만큼 튼튼치 못한 채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도 종종 갖게 됩니다.

늘 험상궂은 그림을 그리는 아홉 살 가람이

늘 험상궂은 그림을 그리는 아홉 살 아이, 가람이. 가람이가 진지하게 그려내는 그림들엔 싸우는 사람들이 자주 나오고, 그들은 마침내 죽거나 장애를 입기도 합니다. 전사와 무기, 무덤과 같은 것들을 그려 놓고, 그림 설명을 해달라는 교사에게 신이 나 이야기해 줍니다.

그날도 교사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이 아이의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렇게 위험하고 평화롭지 못한 그림을 그대로 봐 넘겨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애초에 그리고 싶은 대로 마음껏 그려보라고 했던 교사는 잠시 갈등을 느끼다 하는 수 없이(?) 아이 그림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구나”라고 받아들이는 대신, 조심스레 “왜? 그럼 이 사람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아?” 하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요. 하지만 아이는 제기된 문제에 ‘아, 이건 옳지 않구나’라고 느끼며, 그 다음엔 ‘평화로운 그림’을 그려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와 교사가 서로 제대로 통하지 못하는 느낌을 얻고 말 뿐이지요.

교사의 어정쩡한 거부 반응은 도리어 아이가 자기 마음과 생각을 마음껏 드러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고, 나아가 억압하는 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내면의 욕구나 문제들을 먼저 들여다보아 주지 못하고, 그림이라는 아주 개인적일 수도 있는 표현 양식에 대뜸 어설픈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오히려 아이와 나 사이, 또는 아이 자신을 평화롭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허용된 표현 수단으로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풀어내어 어느새 스스로 평화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지요.

‘교사’와 ‘어른’이라는 권위

스무 살, 교회학교 교사로 처음 아이들을 만났을 때 무척 조심스러워한 기억이 있습니다. 몇년 전, 공부방 실무교사로 일하기 시작할 때도 ‘교사라는 이름을 머리에 얹고’ 자칫 아이들을 누를까 스스로 두려워하며 마음 쓴 기억이 납니다.

지금 내 모습을 그 때와 견줘 본다면,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좀더 원만히 소통하고, 좀더 친밀하게 지낸다는 점을 보면 나아졌다 할 수 있을 테지만, 어쩐지 자신하기 쉽지 않고 마음에 걸립니다. 아이들 사이엔 시시때때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대부분 크고 작은 싸움으로 이어지지요. 그 싸움에서 누군가 상처를 받게 되겠다든지, 서로 감정이 격해져 더 크게 싸우겠다든지 하는 상황이라 판단되면 교사가 끼어들지요. 하지만 감정에 날이 선 아이들은 대체로 교사든 중재자든, 있든 없든 합니다. 이런 때 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내는 나 자신을 봅니다. 갈수록 마음에 거리낌 없이 화를 내어 버리지요. 그리고 스스로 ‘교사라는 이름을 달고’ 이야기가 가능하도록 ‘적당히 분위기를 잡고’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저에게도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의 세계가 그렇듯 아이들도 권위주의에 젖어 있고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지요. 소리 높이지 않고 부드러운 말씨로 아이들의 의견을 물어 가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때, 아이들이 교사를 무시하며 잘 호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체가 힘들어 시간이 길어지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불화와 갈등이 생겨 문제가 커지기도 합니다. 또 바람직하지 못한 가치관에 근거한 생각이나 엉뚱한 논리를 펴며 자기 이야기만 고집스럽게 주장하여 대화가 막혀 버리기도 합니다. 반면, 교사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며’ ‘단호한’ 모습을 보일 때는 일단 자기를 누그리고 ‘상대를 보아 주지요’. 그럴 때 비로소 교사는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다’ 여겨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명을 한다고 해서 제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교사’에다 ‘어른’이라고 아이들과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어도 좋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논리가 통하는 세상을 지지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쉽고 빠른 길로 가겠다고, ‘문제’를 만들어가며 ‘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모순이고, 그렇다고 아이들과 마냥 헤매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여깁니다. 어느 쪽이 분명히 더 낫고 옳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우선은 순간순간 자신을 들여다보고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일상의 분위기를 조금씩 바꾸어 가며 더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드러낼 때 열리는 가능성

갈등과 고민은 교사들과의 관계에서도 일어납니다. 교사들 사이에서도 보이게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위계질서나 권위적인 분위기는 몇몇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이야기되지만 아직도 그로 인한 갈등과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도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더디게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어 다행입니다. 그 더딘 속도에 지치기도, 늘 똑같은 문제 속에 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해 힘들 때도 있지만 찬찬히 되짚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우리의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내어 놓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자체가 가능성이라 여겨집니다.

두서없이 갈팡질팡하는 몇 가지 이야기를 꺼내 놓아 보았지만, 아직도 길을 찾아야 하는 생각들은 더 많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하나씩 둘씩 꺼내 놓고 보면서 조금씩 더 그 결을 잡아갈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들을 차근차근 정직하게 실천으로 이어가며, 조금 더 스스로 벼리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충분히 그러하지 못했음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되돌아봅니다.
덧붙임

이미나 님은 교육공동체 두리하나 실무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