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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빈 강정, 사회복무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고통 외면하는 사회복무제

지난 2월 5일 청와대에서는 ‘비전 2030 인적자원 활용 전략’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저출산·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2010년부터 노동력 부족이 현실화될 것이므로 다가올 인력부족 현상에 대처하려면 보유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실업계 고교 특성화, 학제개편, 군복무기간 단축 등의 조기 취업을 위한 방안들과 기업의 임금체계 개선과 고용형태의 다양화, 정년연장 장려금 등 정년연장 유도를 위한 제도 확충, 고령자에게 유리한 연금급여제의 도입 등 퇴직 연령 연장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을 밝혔다. 특히 병역제도 개선과 관련해서는 현역병 복무기간 6개월 단축, ‘유급지원병제’ 도입이 추진되고 인력활용 측면에서는 전·의경과 경비교도, 산업기능, 공익행정요원제를 폐지하고 사회복무제를 도입하게 된다. 사회복무제도는 병역의무의 형평성 차원에서 신체등급 1~3급 이외의 대상자뿐만 아니라 본인이 희망할 경우 여성이나 혼혈인, 귀화자, 고아도 복무할 수 있도록 하게 한 제도로, 내년부터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새로 시행될 사회복무제도에는 병역거부자들의 인권개선을 위한 어떠한 계획도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병역거부운동 그룹에서 꾸준히 제기해왔던 문제들, 이를테면 방만하고 불평등한 현 대체복무제도에 관한 정리나 군복무 기간 단축 등과 같은 주장은 받아들이면서도 병역거부자들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인 것처럼 이 문제는 쏙 빼먹었다. 또 기존의 대체복무자들이 의무적으로 이행해야 했던 4주간의 군사훈련도, 없애거나 대체복무에 필요한 직능교육으로 대체하지 않고 일주일간 기초 군사훈련을 이행해야 하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신체등급 상 보충역 판정을 받고도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여전히 일주일간의 군사훈련에 대한 거부 때문에 감옥에 가야 하는 처지는 이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정부의 ‘비전 2030 인적자원 활용 전략’안이 발표되고 난 다음 날 주요 매체들은 군 일각에서 ‘이번 병역제도 개편으로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이라는 관측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하면서 ‘언론플레이’를 하는 치졸함마저 보이고 있다. 청와대에서 이번 ‘비전 2030 인적자원 활용 전략’을 계획하고 발표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관련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어떠한 과정도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를 꾸준히 주장해온 입장에서 이번 사회복무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이 있다. 정부는 사회복무자들을 노인 수발 등 사회 서비스 분야에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는데, 노인 수발 등의 사회 서비스 분야에서 사회복무자들이 잘 할 수 있으려면 그에 합당한 직능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러한 직능교육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으면서 1주일간의 군사훈련을 여전히 의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병역거부자들은 4주~6주간의 군사훈련을 면제받는 대신 군복무 기간보다 1.5배 길게 복무하더라도 사회복무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이제 사회복무제가 시행된다면 4주~6주가 아니라 1주간의 군사훈련과 1.5배의 기간에 달하는 복무기간을 맞바꾸는 것이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에도 이러한 병역거부자들의 요구를 무리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결국 이 나라는 국가의 계획과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혹은 나라에 충성한 사람들에게 국가 차원에서 내리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 개인에게 군복무의 선택권을 준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못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안 해주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참고했다는 독일의 사회복무제도는 역사적으로 평화주의적·종교적 신념 때문에 군 입영을 거부하는 병역거부자들에게 군복무 대신 부과하는 사회복무로 태동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주의와 나치즘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심적 개인들이 군복무를 거부하였고 독일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아예 헌법 자체에 병역거부 규정을 명시했다. 한국의 경우도 지난 60년 동안 양심상 집총을 할 수 없다는 병역거부자들이 꾸준히 존재해왔다. 군인이 국민 위에 군림했던 군부독재 시절은 그렇다 쳐도 소위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남북분단을 이유로 이들에 대한 처벌 일변도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고 남북 간의 교류가 활발한 최근까지도 국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죄인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옥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저출산·고령화 시대 인력부족 현상에 대처하기 위한 병역제도의 개선이 요구되고 있는 지금 ‘국가안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독 병역거부자들만 철창에 갇히는 신세에 처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를 노무현 정부는 병역거부자들과 그의 가족 및 평화운동가들에게 해명해야 할 것이다. 현역병과의 형평성 논란이 없도록 대체복무제도를 고안해 매년 700~800여명 정도의 병역거부자들에게 감옥 대신 다른 기회를 주자는 병역거부자들과 평화운동가들의 주장은 이번에도 역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었다.

정부의 ‘비전 2030 인적자원 활용 전략’에는 그 속내야 어떻든 전·의경과 경비교도, 산업기능, 공익행정요원제 폐지나 복무 기간 단축 등 지금까지 시민단체들이 줄곧 주장해 왔던 점을 수용한 것과 같은 긍정적 면모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반세기 동안 외면해 왔고 사회 전체에 공론화된 지 7년이 되어 가는데도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병역거부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점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 사회 군사주의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덧붙임

오리 님은 평화인권연대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