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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보낸 114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치다!

올여름 비가 한창 퍼붓던 8월 21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은 광화문역 지하에 자리를 틀고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과의 치열한 몸싸움과 생리적 욕구를 꾹꾹 참고 버티기를 11시간, 중증장애인들은 계단에서 기어오르기 등 그야말로 온몸을 쓰는 겨루기 끝에 농성할 자리를 잡았다. 한번 와 보시라, 장애계가 농성을 한 후로 가장 좋은 농성 장소라는 호평을 받는 장소다. 그리고 지금, 그로부터 114여 일이 지났고 대선은 코앞에 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라는 다소 어려운 이름의 투쟁과제를 놓고 대선주자들 및 정치권, 정부와 시민들을 상대로 광범위한 설득 작업 중인 셈이다.


서비스를 제한하기 위한 손쉬운 무기, 장애등급제

“장애인들은 뭐 이리 해달라는 게 많아?”
지나가는 시민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장애등급제를 없애면 모든 장애인들이 다 국가보고 뭐 해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장하는 우리를 가장 많이 의심하는 내용이다. 장애를 모르는 시민들에게, 혹여 장애인당사자라 하더라도 복지전달체계를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 이걸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제한된 복지급여 → 가장 시급한 대상자 선별 → 장애등급을 기준으로 복지급여 제공]이라는 손쉬운 방식에 익숙해진, 그리고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시민들은 마지못해 서명에 동참하면서도 끝까지 복지에 쓰이는 국가예산을 걱정한다.

“다 못한다고, 내가 아주 중증이라고 해야 뭐라도 받을 수 있어요.”
어느 장애여성의 말이다. 즉 우리의 장애복지제도는 장애가 발생한 시점에 등록을 하면서 의학적 잣대에 의한 등급을 받기 때문에, 전문의로부터 상위 등급을 받아야 뭐라도 받을 수 있다. 활동보조서비스의 경우 1급에 한해서만 신청자격이 주어지고(1급이라고 다 받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평가기준으로 다시 평가하여 최종 제공 여부를 판단한다), 장애빈곤층을 위한 장애연금의 경우도 소득을 조사하는 것에 보태 장애 중복 3급까지만으로 대상을 제한한다. 장애인콜택시는 서울의 경우 2급까지만 부를 수 있고, 이외에도 각종 서비스는 장애등급별로 차등 적용하고 있다. 그러니 장애인의 입장에서 “나 더 중증이요”라고 주장할 수밖에. ‘자신의 장애를 최대한 비참하게 포장해서 내놔야’ 정부는 수급 여부를 결정한다.

‘나는 2급이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2급 뇌병변장애를 가진 청년이다. 주인공은 친구들에게 영화를 보러 나오라는 전화를 받는다. 지금 엄마가 없으니 나가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답한다. 전화를 끊고 1시간이 지나도 그 청년은 청바지를 입지 못한다. 양팔이 뒤로 틀어져 손과 팔을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바지를 입느라 이마엔 구슬땀이 흐르고, 1시간 30분여가 지나자 다시 친구에게 전화한다. 집에 일이 있어서 못 나가겠노라고...... 양팔 사용이 어려운 뇌병변장애인의 경우라도 2급이면 활동보조를 신청할 수 없다. 그러니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에게 ‘나 좀 도와줘’라며 도움을 호소해야 하는 처지, 누구에게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짐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취업을 할 수 없어 소득이 없는 3급 장애인은 15만 원밖에 되지 않는 장애연금조차 받을 수 없다. 빈곤 장애계층을 위한 연금제도지만 장애급수로 연금대상자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녀의 장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장애등록을 하면서도 경증으로 해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렸던 부모들은 이제 다시 의사에게 중증으로 해달라고 사정한다. (그런다고 바뀌진 않지만) 장애급수가 복지급여를 결정하는 절대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애인서비스는 서비스의 성격에 따라 어떤 장애유형은 특별히 더 어떤 서비스가 필요하고, 어떤 장애는 그 서비스보다는 다른 서비스가 더 다급하다. 즉 장애유형과 개인별 특성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의 종류와 양은 다르다. 현재의 장애등급제도는 장애급수 간 형평성도 없는데다 한 사람의 장애급수로 필요한 서비스가 무엇인지 얼마나 필요한지 선별하는 기준으로 쓸 수가 없다. 장애등급은 그것을 반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빈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연금제도는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되고, 활동보조서비스에 대한 필요도는 그 사람의 일상생활 정도와 주변 환경을 고려한 평가기준이 따로 있어 그것만 적용하면 된다. 즉 서비스별로 목적이 있기에 그 목적에 해당하는 사람이 신청하고 필요도 조사를 통해 주면 되지, 장애급수로 미리 한정하여 신청자를 선별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장애등급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다.) 그런데도 장애등급제로 손쉽게 제공 서비스의 종류와 양을 정하고 싶은 정부의 목적은? 그렇다, 바로 ‘예산’ 때문이다. 일례로 3년마다 시행되는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활동보조서비스가 필요한 장애 인구는 37만 명인데, 이 중에서 정부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5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즉 정부의 입장에서 서비스의 제한하기 위해서는 등급제라는 무기가 필요한 것이다.

부양의무제에 갇힌 빈곤한 사람들

올해 가난한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이 언론에 보도됐다. 경남 거제의 이씨 할머니, 사위의 소득증가로 기초생활보장수급자에서 탈락했다. 사위는 결핵에 걸려 병가 중이었지만 작년 소득기준을 적용하여 탈락했다. 할머니는 유서를 남기고 거제시청 마당에서 농약을 마셨다. 재활병원에 입원해 있던 할아버지는 자신이 수급에서 탈락하자 치매노인요양시설에 있는 자기 부인만큼은 치매로 아무것도 모르니 제발 수급을 유지해달라며 병실에서 몸을 던졌다. 전남 고흥에서 할머니와 손주는 15만 원의 전기료가 없어서 가난과 추위를 촛불로 견디다가 그만 화재로 사망했다. 60세가 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근로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손주는 부모가 외지에서 돈을 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이 안 됐다. 죽은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혼자 살던 할머니는 냉방에서 옷을 껴입은 채 발견됐다. 이 할머니도 11년 동안이나 연락 두절된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이 안됐다. 한강에 모녀가 몸을 묶어 투신한 사건, 할아버지가 장애 손주와 자살한 사건 등 올 하반기에만 해도 빈곤으로 인한 죽음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함께 활동했던 고 김주영 동지도 화재로 사망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은 그저 단편기삿감일 뿐이었다. 절대빈곤조차도 책임지지 않는 국가의 횡포, 그로 인한 죽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새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에는 둔감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끔찍한 일이다.

“월 500만 원에 타워팰리스 사는 아들”
보건복지부와 부양의무제 폐지에 관한 면담을 하면 늘 나오는 예시문이다. 국회의원들하고 면담해도 마찬가지다. 한국사회에서 효는 기본이며, 가족 서로 간에 부양의무를 지우는 것은 가족관계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취지이며, 고소득층의 부모나 자식에게 국가는 기초생활보장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왜? 빈곤의 우선 책임은 개인과 가족이며, 국가책임은 그다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저생계비 이하의 절대 빈곤의 삶을 사는 사람들 약 410만 명, 이 중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기초생활보장을 못 받는 사람들은 103만 명에 달한다. 이때 부양의무자 기준은 실제로 가족이 부양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가족관계상 부양의무자가 있으면 그걸로 땡이다.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면 정부와 보수언론들은 늘 같은 주장을 한다. 효가 무너졌느니, 도덕적 해이니, 부정수급자가 다수 발생할 것이라는 둥, 그 논리는 늘 뻔하다.

“OECD가입국 중 노인빈곤율 1위, 사회공공지출은 29위(2011년 기준, 총30개국)”
현재 우리나라의 빈곤층은 8~9%로 추산되지만 이에 반해 기초생활수급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3%도 채 되지 않는다. 전 국민의 기초생활을 권리로서 보장한다는 본래의 법 취지는 부양의무자 및 근로능력평가 등 잘못된 기준으로 인해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너무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하지만 정부에서도 발표했듯이 OECD 주요국의 공공부조예산은 GDP의 평균 1.16%이지만 중앙정부 예산 기준으로 한국의 경우 0.61%로 절반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구매력 기준으로 1인당 GDP가 3만 달러로 EU 평균치에 근접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로 증가하는 재정은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며, 복지와 기초생활보장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필요 충족, 빈곤의 확산을 방지하고 사회적 건강과 국민의 권리 증진을 위해서는 오히려 더 많은 복지재정확충이 필요하다.

“너희는 언제까지 농성할 거야?”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나도 대한문 ‘함께 살자 농성촌’에 가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그 사이 농성 이웃사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래서 대한문 농성촌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진보영역의 후보들은 당연히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약속했다. 문재인, 박근혜 후보는 장애등급제 폐지는 약속했으나 부양의무제는 “기준 완화”라 발표했다. 114여 일 동안 농성한 결과 반쪽짜리 성과를 낸 셈이다. (실현되기 전까지는 미지수지만.) 예전에 이명박 대통령도 공약으로 수급자 수 확대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오히려 수급자 수는 190만 가구에서 141만 가구로 대폭 줄어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부양의무제 폐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높다. 농성을 언제 끝낼지,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지, 약속받은 공약은 실현될지, 약속받지 못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이 모든 질문들을 품고 오늘도 각자 발 딛은 공간에서 최선을 다할 동지들에게 연대의 힘을 전한다.
덧붙임

김정하 님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로 현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파견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