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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공룡트림] 얼어붙은 심장을 향한 동화

『불새의 춤』(이원수), 『마우스 랜드』(토미 더글러스)

영화나 소설 속에 좌절한 청춘들이 자주 내뱉는 말이 하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화 속 세상이 아니야.” “동화는 없어.” 완전히 희망을 상실한 상태의 좌절감을 드러내 놓는 말일 테다. 순진무구한 동화의 세계와 악랄한 현실의 세계가 다르다는 괴리를 느끼면서 사춘기, 청춘이 시작된다는 근대의 표상일수도 있겠다.

반대로, 현실의 좌절을 동화의 세계로 도피하려 극복하고자 한 사람들도 있었다. 1900년대~1920년대 초기 유럽, 일본 등지의 동화작가들 중에는 현실에 대한 실망감을 해결하기 위해 동심의 세계에 안주하길 바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여기서 동심이란 ‘어린이의 마음’, ‘어린이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현실의 어린이들과는 차이가 많다.

어린이 역시 현실 속에서 여러 갈등에 놓여있을 텐데, 이들은 그것들을 제거하고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만을 어린이의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고통과 갈등을 제거하고 순화된 백색의 아름다운 세계만이 어린이의 것이라고 말한다. 어린이를 세상의 여러 역동에서 떼어 놓고 백색의 세계에 격리시키면서 ‘사춘기’, ‘청춘’이라고 하는 근대의 표상이 만들어졌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동심주의 세계는 우리가 꿈꾸는 세계를 마음껏 상상하고 희망하는 이야기의 힘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고통, 갈등, 좌절을 제거하지 않은 그대로의 세계를 그대로 그려내 보여주는 이야기를 어린이들과 함께 나눈다면 어떨까. 거짓된 세상의 진실은 거짓된 세계를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닐까. 순진무구한 백색의 동심주의 세계에 반하여 우리 현실 속 세계를 함께 나누고자 시도한 작가들이 또한 한 축에 존재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실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모른 척 어린이들 삶에서 밀쳐 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고 깨달아가며 세상에 대해 비평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은 어떨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멀리 있지 않기에 다시 꺼내어 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 두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몸을 태워 타인의 심장을 녹이려 했던 새, 『불새의 춤』(이원수, 1970)

해가 지나도 노동자의 죽음 소식은 끊이지 않는다. 벌써 쌍용차 노조 조합원/가족 19명이 목숨을 끊었고, 얼마 전 현대자동차 조합원이 현장 통제에 항거하여 분신했다. 1970년 전태일이 분신한지 40년이 흘렀는데, 노동자의 현실은 나아진 것이 없다. 김진숙/희망버스가 보여준 ‘희망’과 노동자의 ‘죽음’이 교차하여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김진숙/희망버스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 그 밑바탕에는 ‘고통’에 연대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고통’에 연대할 수 있을까. ‘도가니’ 현상이 보여주듯 문학, 영화 등 사람에 대한 이야기기가 그 감수성을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동화 역시 그 몫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

40년 전 이원수가 그랬다. 전태일 분신 후 노동자의 현실과 전태일 분신의 의미를 재빨리 짧은 동화 한 편으로 그려냈다. 그것이 바로 『불새의 춤』(1970)이다. 여기서 전태일은 두루미 무용원에서 서커스 노동을 하고 있는 학두루미로 묘사된다. 학두루미 30마리가 매일 손님들 보는 데서 춤을 춘다. 하지만 두루미 무용원 원장은 한 끼에 단 세 마리의 물고기만 준다. 71호 두루미는 게으름을 피웠다며 미꾸라지 한 마리만 주었다.

어느 날 28호 두루미가 현실을 부당하게 여겨 물고기를 갑절로 늘려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28호 두루미가 전태일을 상징한다. 그러자 원장은 춤을 더 잘 추면 여섯 마리로 늘려주겠다고 약속한다. 28호 두루미는 그 말을 믿고 더 열심히 일해 보았지만, 오히려 돌아오는 물고기 양이 더 줄어 두 마리가 됐다. 28호 두루미는 “원장의 강철 같은 고집과 얼음 같은 마음을 녹일 길”이 없을까 고민한다. 그리고 결국 그 다음 날 두 마리의 미꾸라지를 입에 물고 석유를 몸에 발라 내버려진 성냥개비 불씨에 몸을 밀어 붉게 타올랐다. 불덩이가 된 28호 학두루미가 공중에 날아올라 불춤을 춘다. 불꽃이 긴 날개에서 다리끝으로 옮겨붙으며 활활 타오르는 것을 놀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28호 학두루미가 외친다. “얼음 같은 심장을 녹이시오.”

이원수「불새의 춤」은 『꼬마옥이』(창비)에 단편으로 실려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고, 전태일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http://www.chuntaeil.org/section2/suz/su31.htm) 동화 전문을 볼 수 있다. [사진출처: 전태일기념사업회]

▲ 이원수「불새의 춤」은 『꼬마옥이』(창비)에 단편으로 실려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고, 전태일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http://www.chuntaeil.org/section2/suz/su31.htm) 동화 전문을 볼 수 있다. [사진출처: 전태일기념사업회]


쥐들이 사는 세계에 고양이를 위한 고양이법이라, 『마우스랜드』(토미 더글러스)

또 하나 소개할 이야기는 마우스랜드이다. 이것은 한 편의 우화인데 동화작가가 만든 이야기는 아니다. 토미 더글러스라고 하는 캐나다 정치인이 1962년 의회에서 연설한 내용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기보다 어른들을 위한 우화일 수 있을 텐데, 어린이들과 함께 이야기 나눌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소개한다.

마우스랜드는 모든 생쥐들이 태어나서 살고 놀다가 죽는 곳이다. 이곳에도 정부가 있는데 정부는 거대하고 뚱뚱한 검은 고양이로 이루어졌다. 고양이는 좋은 법을 통과시켰는데, ‘고양이에게 좋은’ 법이었다. 쥐구멍이 고양이의 발이 들어갈 수 있도록 충분히 커야 한다는 법, 생쥐가 일정한 속도 이하로 달려 고양이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아침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 법을 만들었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 생쥐들은 정부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흰 고양이를 뽑았다. 흰 고양이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고 하며 ‘좋은 법’을 만든다. 마우스랜드의 문제가 둥근 모양의 쥐구멍이라고 주장하며 네모난 모양의 쥐구멍을 만들었는데, 둥근 쥐구멍보다 두 배로 커져 고양이 두 발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여러번 정부를 바꾸지만 그 때마다 고양이들은 생쥐들의 목소리를 내는 척하면서 잡아먹었다.

어느 날 홀연히 생쥐 한 마리가 나타나 질문을 던진다. “대체 왜 우리는 고양이들을 정부로 뽑는 거야? 생쥐로 이루어진 정부를 왜 뽑지 않는 거지?” 하지만 그 생쥐는 빨갱이 생쥐라고 잡혀 갇히게 된다. 몸을 감옥에 가둘 수는 있어도 생각을 가둘 수는 없다는 메시지로 이 짧은 우화는 끝을 맺는다.

이것은 마우스랜드의 이야기면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둥근 쥐구멍이냐, 네모난 쥐구멍이냐 하는 1%의 논리에 따라 99%의 삶이 잠식되고 있다. ‘고양이의 논리’, 즉 그 “꼼수”가 얼마나 비열하고 속임수로 가득 찼는지를 보며, 1%가 세상을 잠식하는 악랄한 논리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어른들은 어쩌면 이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위험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1%, 99%의 논리는 자본가-노동자의 대항을 구분하는 논리이기도 하지만, 어른-어린이의 권력 불균형을 말하는 논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우스랜드는 책 『마우스랜드』(책보세)로 볼 수 있고, 동영상 http://youtu.be/VdZeW9vG1xg 으로 찾아볼 수 있다. 동영상은 토미 더글러스 연설에 애니메이션을 붙여 만들었다.

▲ 마우스랜드는 책 『마우스랜드』(책보세)로 볼 수 있고, 동영상 http://youtu.be/VdZeW9vG1xg 으로 찾아볼 수 있다. 동영상은 토미 더글러스 연설에 애니메이션을 붙여 만들었다.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는 ‘따뜻한 동화’가 아니라 균열을 일으키는 ‘서늘한 동화’

모든 동화가 다 그렇게 ‘서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거짓된 따뜻함이 우리 인간의 감수성을 더 무디게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심장을 움직이는 힘은 심장을 녹이는 따뜻함이 아니라, 심장의 오랜 흐름을 거꾸로 뒤집을 수 있는 균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과 이런 이야기들을 나눈다는 것은 어린이들이 세상에 참여하고 비판하도록 이끈다는 뜻일 수 있다. 부당하고, 아프고, 꼼수에 속고, 친구를 가두기도 하지만, 결코 가둘 수 없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동화이다. 그렇게 대화를 이끌고, 소통을 이끌어, 변화를 추구하는 심장을 하나 둘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동화가 더 많아졌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덧붙임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