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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법원도 이제 진실로 성큼

서울중앙지법, '인혁당' 사건 재심 개시 결정

유신체제 아래에서 권력의 꼭두각시로 부끄러운 사법살인을 저질렀으면서도 진실 규명을 위한 재심요건에 대해서는 엄격하던 사법부가 재심의 턱을 낮추는 결정을 내놨다.

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재판장 이기택)는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8명의 유가족이 2002년 12월 청구한 재심의 개시를 결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1974년 5월 27일부터 진술 조서를 받은 6월 초 사이에 서울 남산 소재 중앙정보부 6국 지하 보일러실 등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중앙정보부 소속 수사관과 파견 경찰관들로부터…폭행 및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수사관이 그 직무에 관하여 형법 제125조 소정의 독직폭행죄를 범한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할 것이다"라고 결정문에서 밝혔다. 재판부는 재심 사유와 관련된 사실 인정에서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를 증거로 받아들였다.

형사소송법 제420조 7항에 따르면 원판결의 기초가 된 조사에 관여한 법관,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공소의 기초가 된 수사에 관여한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될 때 재심을 개시할 수 있다. 이 사건의 경우 문제가 되는 독직폭행죄는 공소시효가 5년밖에 되지 않아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지만, 그럴 경우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재심을 개시할 수 있다고 형사소송법 제422조는 규정하고 있다. 이 확정판결에 대신하는 증명으로 재판부가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인정한 것이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염규홍 조사과장은 "이제까지는 재심요건을 엄격하게 해석해 왔는데, 다른 국가기관의 조사 결과를 법원의 판결에 준하는 재심요건으로 본 초유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번 결정에 대해 검찰이 3일 안에 불복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사건은 새로운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에 배당되어 일반 형사사건과 똑같은 심리가 이루어진다.

재심을 청구한 유가족 가운데 한명인 이영교(당시 피고인 고 하재완의 배우자) 씨는 "31년간 울면서 발버둥치던 게 이제 와서 이루어지니까 함세웅 신부와 응암동 성당에서 장례 미사 드리던 일, 사형장 앞에서 몸을 뒹굴 때 경찰에 끌려갔던 일, 실신해서 병원에 입원했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라면서 "오늘 두 농민의 사망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노대통령이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과를 받으면 좋겠다. 사법부가 전 대통령인 박정희의 꼭두각시가 되어 행한 일이 아니냐"라고 덧붙였다.

천주교인권위원회와 1998년 구성된 인혁당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을위한대책위원회는 이날 성명서를 내 "이번 인혁당사건의 재심 개시 결정을 계기로 모든 조작·의혹 사건의 진실의 규명을 위해 정부와 사법부, 또 관련이 있는 모든 기관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며, 그 길만이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1974년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배후조종 세력으로 인혁당재건위를 조작해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이 8명에게는 대통령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등의 혐의가 인정되어 1975년 4월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전원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2년 9월 제1기 의문사위는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임을 밝혔고, 지난 7일에는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가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인혁당·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였으며, 권력자의 자의적 요구에 따라 수사방향을 미리 결정, 집행된 사건'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