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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갚을 능력 없이 카드 쓰면 사기죄?

대법원 판결…민사책임에 더해 형사처벌까지

대법원이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 등을 받았다가 연체한 사용자들에 대해 상환능력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사기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연달아 내놔 빈곤사회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14일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 14일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지난 10월 27일 대법원 1부(주심 강신욱 대법관)는 (주)삼성카드로부터 발급받은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대출 등 약 2500만원을 사용한 피고인의 사기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대전지법 합의부로 환송했다. 재판부는 "카드회원이 일시적인 자금 궁색 등의 이유로 그 채무를 일시적으로 이행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과다한 부채의 누적 등으로…대출금 채무를 변제할 의사나 능력이 없는 상황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를 사용하였다면 사기죄에 있어서 기망행위 내지 편취의 범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앞서 9월 30일 대법원 2부(주심 이강국 대법관)도 삼성카드로 대출·현금서비스를 받았다가 약 2000만원을 갚지 못한 피고인의 사기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같은 취지로 뒤집었다.

이 사건의 원심 재판부인 광주지법은 "신용카드의 속성상 현재는 비록 채무초과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도 장래의 신용을 담보로 하여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신용카드를 사용할 때마다…자신의 신용상태를 고지하여야 할 계약상…의무가 있다고 할 수 없"다며 "신용카드를 사용하거나 이를 이용한 대출을 받음에 있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용상태에 관하여 허위의 내용을 고지하는 등 구체적인 기망행위와 함께 편취의 범의가 입증된 경우에만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판단한 바 있다.

기자회견에 이어 시작된 1인시위

▲ 기자회견에 이어 시작된 1인시위



잇따른 대법원 판결에 대해 금융피해자파산지원연대(아래 파산지원연대), 빈곤과차별에저항하는인권운동연대 등 빈곤사회단체들은 14일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금융기관 및 여신기관(카드사)의 묻지마식 카드발급과 과도한 고금리와 실업과 고용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던 신자유주의의 참담한 구조조정의 결과 '빚을 갚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지 못하는' 금융피해자들의 피끓는 고통을 대법원은 무참히 짓밟아버렸다"며 "(카드사의) 공격적인 법률적 대응과 과도한 추심행위로 이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비판했다.

파산지원연대 박효석 대표는 "대법원 판결 이후 (금융피해자들로부터) '빚진 것도 힘든데 사기꾼까지 되는 것 아니냐'는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며 "대법원은 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만든 사회의 책임도 얘기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IMF 이후 경기침체로 개인의 대출변제능력은 약해졌지만 카드사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경쟁적으로 공격적 영업에 돌입해 부실만 키웠다. 카드사들은 길거리 카드발급이나 미성년자 카드발급 등 이른바 '묻지마 카드발급'에 앞장섰고 정부도 한몫 거들며 신용카드 복권제 등 세수확대를 위한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 과정에서 카드사의 현금서비스 한도제한 폐지나 발급조건 완화조치 등이 채무자 양산의 발단이었다고 박 대표는 지적했다.

한편 이번 대법원 판결은 신용카드사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그동안 신용카드 연체 사건은 채권채무관계로 형사사건이 아닌 민사사건으로 다뤄졌다. 형사처벌인 사기죄는 돈을 빌릴 때 처음부터 사기 의사가 있어야만 적용 가능했다. 따라서 연체율을 줄이기 위해 카드회사는 발급시 신청자에게 상환능력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해 한도를 설정할 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신용카드사가 상환을 위한 고소를 남발하자 법조계 일각에서는 아예 신용카드사를 무고죄로 다뤄 경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왔다. 단지 돈을 갚지 않았다고 해서 형사처벌까지 간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하지만 이번 판결에 따라 신용카드사는 상환을 독촉할 수 있는 '형사처벌'이라는 무기까지 갖게 됐다.

빈곤사회연대 유의선 사무국장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최소한의 생계비도 받지 못하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며 "국민에게 사기 쳐서 돈 번 자들, 소비를 부추겨 신용카드로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자들이 누구인데 사기죄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기자회견에 이어 참석자들은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