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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더이상 죽이지 말라

정용품, 오추옥 씨는 쌀을 지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11월 15일 여의도 농민대회에 참석했던 전용철 씨는 두 차례의 뇌수술 끝에도 결국 소생하지 못했다. 농민들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쌀 개방 비준안은 결국 23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농민들은 고속도로 상행선을 가로막은 경찰 앞에서 생명 같은 볏 가마를 불태우며 항의했다.

정부와 여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국제무역 협상이 우리 농민들의 목숨보다도 소중함을 입증하려는 듯했다. 어떤 항의와 저항도 소용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농민대회에 대한 광적인 진압은 15일에 이어 이번 주에도 계속되었다. 자유무역질서를 확대하는 세계무역기구(WTO) 도하 아젠더의 시급한 타결을 촉구하는 아펙(APEC) 회의 반대 투쟁을 컨테이너 박스와 폭력으로 압살한 경찰의 이런 행태는 이미 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우리는 생존권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투쟁을 경찰폭력으로 압살하는 정부의 태도에서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모습을 예감한다. 벼랑 끝에 내몰린 농민,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생존권적 요구에는 항상 폭력으로 응답해 온 게 정부의 일관된 모습이었다. 이제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들의 표도 아랑곳하지 않고 폭력의 광기로 생존을 향한 절망의 몸부림을 다스리려 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농민들의 요구는 복잡하지 않았다. 쌀 개방 협상안을 비준하기 전에 농민 대표가 참가하는 회의를 통해 농민의 생존 대책부터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이번 협상안의 이면 합의 내용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이미 수천만 원씩의 농가부채, 추곡수매마저 포기한 뒤 곤두박질치는 쌀값에 대한 보상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식량이 무기로 쓰이는 판에 세계 곡물시장을 석권한 다국적 곡물회사에게 고스란히 쌀 시장을 내놓지 말고, 고독성 농약에 오염된 저가 중국 농산물에 대한 대책도 없는 쌀시장 개방을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미 다 죽어간 농촌을 살릴 길을 정부와 농민단체가 같이 모색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요구에 대한 정부의 응답이 오로지 경찰폭력이었을 때, 농민들은 극한적인 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처럼 타들어간 농심에 경찰의 날선 방패가 날아들고, 피 흘리는 농민들의 뒤를 쫓아가 몽둥이로 내리치는 경찰은 더 이상 정당한 공권력이길 포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경찰이 답할 차례다. 고 전용철 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폭력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앞으로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허구적인 인권경찰을 내세우는 허준영 경찰청장은 일련의 경찰폭력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또 정부는 경찰의 뒤에 숨지 말고, 진심으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생존권적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WTO 국제무역 협상에서도 민중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정부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정부는 폭력 경찰을 뒤로 물리고 민중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대책을 시급히 제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