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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고] 프랑스 이민자사회의 봉기, 그 원인은?

10여일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폭력사태가 잦아들고 언제나처럼 듬직한 국가가 질서 회복에 나서고, 그리고 이제 우리의 관심도 잦아들 것이다. 이와 함께 프랑스에 대한 우리의 무지함을 부끄러워하고 우리의 이주노동자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던 잠깐의 경험도 잊혀져갈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10여일간 우리로 하여금 프랑스를 다시 보게 한 소란했던 1막은 11월 8일 시라크 대통령에 의한 긴급사태 선포와 함께 막이 오른 조용한 2막의 보조장치였는지도 모른다. '공화국'과 '치안'이라는 이름의 2막은 이제 관객이 떠난 후 보다 근본적인 프랑스사회의 변화를 그려갈 것이다. "공공질서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질서 회복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오랜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대통령의 말처럼 이 과정은 장기간에 걸쳐 심도있게 프랑스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럼 이번 사태의 전개과정을 되짚어 보면서 필자의 이러한 우려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보자. 먼저 이번 사태의 발단은 2005년 10월 27일 경찰의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세 명의 청소년들이 잠시 피신해 있던 변압기 설치지역에서 감전사고를 당했고 그 중 15살, 17살 두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자체는 1980년대 프랑스에 이민문제, 특히 이민 2세의 사회통합문제가 대두된 이래 지속적으로 있어 온 유형의 사건이었다.


게토에 갇힌 차별과 분노

80년대에 들어 유럽국가들에서는 이민문제가 부상하였고 빈곤화 현상과 함께 주된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이민문제, 이민에 관한 사회의 논의는 특히 이민 2세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독일의 터키인들, 프랑스와 벨기에의 북아프리카 아랍인들, 영국의 카리브해 지역 출신과 남아시아인 2세들이 그들이다. 프랑스의 경우 이민문제의 탄생은 유럽 전역에서의 노동이민의 원칙적 금지와 자유왕래의 금지(1974년)로 이민이 영구화된 사람들의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정치적 대표성의 미약, 80년대 이래의 인종차별의 분위기에 있었다. 이민문제가 나타난 것은 80년대 초반인데, 이때가 50년대, 60년대에 독신으로 이민 온 노동자들의 2세들이 20대가 될 때이다. 프랑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갈 길이 차단된 외국인, 그 중에서도 비유럽인들과의 공존이 부담스러워서 당시 경제불황과 실업, 치안문제 등의 속죄양으로 이들을 만드는 극우파들의 논리에 동조하였다.

한편, 이민자들, 차별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던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프랑스 사회의 시민으로서의 권리, 즉 고용, 정치, 문화 영역에서의 권리들을 요구하게 되고, 열악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81년 미테랑의 당선 이후 분출된 이러한 요구들은 반인종주의 단체 '인종주의 경보'(S.O.S racisme) 등을 중심으로 한 집회와 평등을 위한 평화행진 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북아프리카 출신으로서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프랑스 사회의 가치를 더 강조하는 보편주의적 흐름이 있었다. 사실 북아프리카 등 이민자들의 본국에서 동시대에 진행된 이슬람의 부상에 힘입은 전자의 경향은 이주노동자들을 경제적 차원에서 인식했고 통합 또는 동화라는 전망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추구했던 1970년대 이전의 시기, 즉 전후 재건과 눈부신 성장의 시기(the Golden Age)와 비교해 볼 때 새로운 것이었다. 프랑스사회 역시 이들의 문제를 주로 문화적 차이, 특히 종교적 차이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9·11테러는 이 경향에 결적적인 힘을 실어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든 사건, 모든 현상에 종족적, 종교적 요인이 언급되었고 미디어를 통해 북아프리카 출신자들은 이슬람주의자 내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가 고착화되었다.

이에 따라 대부분 이민출신자로 구성된 주민들이 높은 실업률과 낙후된 주거 및 교육 환경에 처해있던 도시 외곽지역의 거리는 항상 경찰과 청소년들의 사소한 마찰이 있었고 특히 마약밀매나 테러에 대한 대응을 명분으로 한 신분증 제시요구에서 촉발된 폭력과 사망사건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사건이 있고 나서는 다른 경우에서처럼 분노한 친지들과 동네 청년들이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아래에서 살펴볼 이번 사건에 고유한 양상이 아니었으면 여느 때처럼 이 비극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되고 되살려질 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번에는 과거와 다른 특별한 양상을 띠었는가? 사실 외부세계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들은 대부분 상당기간 지속되어 온 요인들이며 그것은 빈곤과 배제, 게토화와 인종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1980년대 이래 장기불황과 그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대응의 결과를 가장 첨예하게 겪었던 북아프리카 출신 외국인 또는 프랑스인들은 30%에 달하는 실업률과 취업전쟁, 제자리를 맴도는 비정규직의 경험, 그리고 교육, 주택, 의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겪어왔다. 이들의 현실은 이번 긴급사태 선포와 함께 제시한 대책에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 대책은 무엇보다도 이번 사태가 촉발된 이민 출신 프랑스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낙후된 지역들에 집중되어 있는데 기업유치에 유리한 환경의 조성 우선적으로 이 지역 청년들의 고용문제 지원 경찰병력 증원 지역사회단체에 대한 보조금 증액 대다수의 주민들이 사는 노후한 아파트들의 리모델링 지원 교원 및 보조인력 확충 장학금 증액 등이 그것이다.

결국 우리에겐 모든 게 새롭지만, 그리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이들의 경제적 조건이 최근 몇 년간 급속히 악화되었고 그래서 이번 사태가 촉발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설명이다. 2000년대 들어서 고용상태는 오히려 다소 호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거꾸로 호황기에 나타나는 사회운동의 분출로 이번 사태를 해석하는 것도 이번에 나타난 저항운동이 조직적인 사회운동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집단행동이고 희망보다는 절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봉기 뒤에 가려진 지배세력의 의도

우리는 "왜 지금, 그리고 이렇게 예상치 못한 양상으로?"라는 의문의 답을 현 정권의 극단적인 대응방식에서,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백인 주류사회와 그들을 대변하는 기성 정치인들의 사고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정말 새로운 것이었고 소요사태 자체만큼이나 그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대응도 정말로 의아한 것이었다. 지난 며칠간의 상황으로 돌아가 이 점을 밝혀보자.

먼저 "폭력에 대해 조금의 관용도 없을 것이다"라는 내무장관 사르코지의 선언은 장례식 다음 날, 별다른 폭력사태가 없었던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망사건 며칠 전에도 이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는 이민출신 청소년들을 "쓰레기"라고 불렀었다. 그리고 경찰은 추모인파가 모인 이슬람사원에 최루탄을 쏘며 이에 화답했다. 시라크 역시 침묵으로 사르코지를 지원했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나온 그의 첫 발언은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아니라 질서존중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좀 더 깨보자. 우리는 사르코지만이 예외적으로 과격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르코지는 대다수의 좌·우파 국회의원, 그리고 수상 및 대통령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다. 더 나아가 그의 인종차별적 폭언은 여론의 지지로 가능한 것이었다. 르뺑의 경우도 그렇듯이 프랑스 국민(여기에는 심지어 주류 백인뿐 아니라 일부 아랍출신 프랑스인까지 포함)이 사르코지와 현 정치인들을 실수로 선택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민문제는 극우파와 불우한 백인 하층민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은 실업, 치안 등 모든 프랑스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이민자들을 지목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모든 정치세력이 이 길에 합류하고 나섰다. 즉 이민문제의 정치도구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2002년 선거에서 시라크는 '폭력'과 '치안'이라는 테마로 유권자들을 사로잡았고, 놀라운 것은 사회당 역시 이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권자들의 표가 생명인 정치인들은 그들의 치안담론이 대다수 국민들에게 매력적인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 사태를 알린 심각한 차량방화 사태는 바로 이러한 위로부터의 자극 이후에 등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번 폭발한 자연발생적인 분노는 다른 경우와 달리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고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점은 이 어려운 국면에서도 폭력의 악순환을 막으려는, 폭력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억압의 빌미를 정치인들과 그들의 백인 지지자들에게 제공하지 않고 합리적인 문제해결의 좁은 길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민출신 프랑스인들의 침묵시위와 놀라우리만큼 침착한 현장에서의 대응방식이다.


'긴급사태' 선포는 비백인들에 대한 선전포고

그러나 사태를 완화시키려는 이들 주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질서회복을 반복하는 무성의한 시라크의 말이나 드 빌팽 수상의 뜬 구름 잡는 대책으로 인해 폭력적 상황은 심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이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관장하는 사르코지 내무장관은 두 소년의 사망사건에 경찰이 책임이 없다거나 청소년들의 폭력이 자연발생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조직된 범죄라는 등 자극적인 발언을 계속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부추긴 폭력적 상황을 근거로 '긴급사태' 선포라는, 비백인들에 대한 종족전쟁의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1955년 식민지 시대에 있었던 알제리 전쟁 상황에서 생겨난 예외적인 법적 장치인 이 조치에 따르면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할 수 있고, 검문, 가택연금, 집회제한, 가택수색 등을 매우 용이하게 할 수 있으며 언론통제도 가능하다.

긴급사태 선포는 돌아올 수 없는 강, 쉽게 씻을 수 없는 상처, 회복될 수 없는 심리적 장벽을 주류세계와 이민출신 세계 사이에 드리웠다. 지배세력은 마치 지금 프랑스의 현실이 알제리 전쟁 때처럼 내전상황, 즉 적대적인 두 진영간의 전면전 양상을 띠고 있다는 인식을, 특히 프랑스인들과 아랍인들간의 종족전쟁 상황이라는 인식을 강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봉기는 '최종편'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의 '예고편'일 뿐이다.
덧붙임

엄한진 님은 성균관대 연구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