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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국정원 개혁

국정원의 이른바 안기부 불법도청 사건에 대한 중간조사결과 발표는 충격적이다. '인권대통령'임을 자임하며 스스로 도청의 최대피해자라고 자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에도 과거 군사정권과 마찬가지로 불법도청이 자행되었음을 국정원이 스스로 밝힌 것이다. 그동안 도청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던 휴대전화 도청도 국정원이 직접 장비를 개발하면서까지 자행했음이 드러났다.

김승규 국정원장은 과거 잘못을 깊이 반성한다며 국민에게 사과했고 2002년 3월 이후 불법도청은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공언했지만 누가 이 말을 믿겠는가. 그동안 국정원이 불법도청은 없으며, 휴대전화는 기술상 도청할 수 없으니 안심하라는 거짓말을 대국민 광고까지 내면서 주장해 왔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지금 노무현 정권에서도 불법도청이 자행되지 않았음을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국내 정보를 수집하는 직제와 부서가 존속하는 한 정보기관 속성상 불법도청이 계속 이루어졌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국정원은 여러 행정부처의 상위에서 정보 및 보안업무를 기획·조정할 수 있어 정보수집대상을 정부 각 부처로 확대해 놓고 있고, 테러방지법 제정을 수차례 기도하며 권한 확대를 노려오지 않았는가.

국정원이 스스로 치부를 드러냈다고 해서 이 사건이 대국민 사과 정도로 미봉되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불법도청을 지시하고 실행한 책임자를 가려내고 엄중히 처벌함은 물론 도청팀의 운영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하면서 생산된 정보를 이용해온 관계자들에게도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정보기관은 합법성보다는 합목적성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는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인적청산을 이뤄야 한다. 또한 불법도청의 전 과정을 객관적인 검증 장치 또는 기구를 통해서 국민 앞에 낱낱이 밝히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

이번 사건은 국정원을 근본적 개혁의 도마 위에 올리는 일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일깨운다. 민간정부 이후 국정원의 개혁은 늘 미봉에 그쳤고, 그런 결과가 오늘날까지 불법 도청의 관행을 있게 만들었다. 우선 먼저 96년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서 회복된 국정원의 수사권을 박탈해야 한다. 국정원은 이른바 '보안사범'에 대한 수사권을 근거로 정치권·노동계·시민단체·문화계에 대해 사찰을 벌여왔고 각종 인권유린과 정치공작에 개입해왔다. 하지만 구성원·조직·활동내용 등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비밀정보기관이 외부로부터의 감시와 통제도 받지 않으면서 적법절차를 지켜야 하는 수사권을 행사하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와 함께 국정원의 국내사찰업무를 전면 중단시키고 해외정보만을 다루는 순수 정보기관으로 축소, 재편함으로써 국민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을 해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보수집 기능에 충실한 국정원을 원하는 것이지, 법과 제도를 비웃으면서 인권유린을 일삼는 빅브라더, 국정원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아울러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청을 비롯한 통신에 의한 개인정보 침해에 대한 근절책을 마련해야 한다. 시장에서는 누구든지 도청 장치를 쉽게 구입할 수 있으며, 국민의 사생활은 정보기관에만이 아니라 사인들에게도 노출되어 불안에 떨게 한다. 전화, 휴대폰, 이메일 등이 누군가에게 도청, 감시되고 있다는 이런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통신비밀보호법을 전면적으로 강화하는 개정작업에 국회가 나서야 한다.

한편 이번 국정원 도청 발표가 'X-파일' 사건의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작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정경, 권언 유착이라는 고질적인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는 불법도청과는 별도로 국민의 알 권리 해소와 과거의 불법적인 권력 행태를 척결하기 위한 기회로 삼을 것을 각종 여론조사는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특검을 통하든 특별법을 통하든 이번에 드러난 정경, 권언 유착의 뿌리를 잘라내는 일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진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국정원, 언론계, 재벌을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