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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두시간의 인권이야기] 나의 소원

고향꿈

추억 속에 가물거리는 옛 대추리다. 53년 전 집도 땅도 선산도 미군에게 내주고 우리 네 식구 맨 몸뚱이로 뿌리뽑혀 나왔지만 기억마저 빼앗기진 않았다. 한 젊은 작가가 질기게 찾아와 한 달 넘게 나와 친구들을 노인정에 불러냈다. 우리 살던 옛 대추리 지도를 그려 마을 초입에 세우자고 했다. 상상지도를 완성한 날 우리는 머리를 맞댄 고민 끝에 이런 문구를 새겨 넣기로 했다.

"나는 지금도 미군부대 철조망 안, 나의 고향 구대추리에서 열다섯 살이 되어 뛰노는 꿈을 꾼다. 한 번 잃어버린 고향인데 또 다시 지금의 대추리를 잃어버려 두 개의 꿈을 꿀 수 없기에 오늘도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싸움이 이기는 날, 그날을 위해 고향을 지킨다. 2005. 4. 27. 대추리 주민 일동."

'두 개의 꿈을 꿀 수 없기에'에서 "와 멋지다!" 우리끼리지만 탄성도 나오고 박수도 터졌다. 이 날은 참 기분 좋게 마셨다.

미칠 것 같은 내 심정을 쫓겨나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고생한 얘기하면 뭐해여" 하고 한숨으로 가슴을 쓸어 내릴 뿐이다. 추수철에 쫓겨나 야산에 땅을 파고 지푸라기 위에서 겨울을 났다. 열 살 어린 나이에 구걸에도 이력이 났다. 우린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맨날 돼지 마냥 쑤셔 넣고 살아가다 부실한 사람들은 그때 '옘병'으로 홍역으로 다 죽었다.

손이 안보이게 40년을 일했다. 간기에 전 뻘밭에서 새 땅을 만들자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뿐인가. 뼈빠지게 간척하고 땅 빼앗기고. 타동에서 왔다가 그렇게 빈털터리로 돌아간 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빌어먹을 대한민국 간척사(史)! 자식들 교육시키고 여우살이 시키고 이 집 지은 지 겨우 10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다 그렇다. 그렇게 하고 여적 살아서 이제 좀 살만 하니까 또 나가라는 거다. 그러니 여간 억울한가.


자유

두 개의 고향꿈을 꿀 수 없다고 했지만, 내겐 그게 다가 아니다. 매일 밤을 꼬박 새고 앉았다. 또 쫓겨난다고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국가에서 누르면 우리가 막아낼 재간이 있을까? 저들은 우릴 밀어내려고 한다. 지장물조사 때 똑똑히 봤다. 대한민국에 법이 있다는데,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와서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상의하면 좋겠는데, 국방부에서 편지 한 장 오더니만 "땅 내놔라. 얼마 찾아가라." 이게 말이 되는 얘긴가? '우릴 왜 이렇게 무시하나' 울컥 눈물이 난다.

만약에 잘못돼서 눈물을 머금고 쫓겨난다면 나하고 안식구하고 여든 여덟 드신 우리 어머니 모시고, 그렇게 셋이 어디 딴 데 가서 살고 싶다. 옛날부터 정든 친구들 다 같이 살아온 여기 떠나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디 가서 사나, 생각하면 밤새도록 잠이 안 온다. 정말이지 나는 딴 데 가서 살지 못할 것 같다. 몸뚱이 다 부서진 늙은이가 어디 가서, 살 데가 없다. 나의 소원은 그냥 이렇게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 같다.

내겐 그래도 기쁨의 순간들이 있다. 오랜 친구들과 함께 마을을 돌면서 "이 집은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집입니다. 국방부(평택시, 토지공사, 한국감정원, 주택공사) 우편물수취거부, 감정평가거부"가 쓰인 잘 만든 팻말을 달았다. 기분 좋게 친구들에게 짓궂은 장난도 치고 만발한 꽃무더기를 끌어안고 웃기도 했다. 우리 삶의 질을 돈으로 매기는 이 계획, 보상하면 된다는 이 계획을 두고 가난한 한 친구가 "돈? 너 돈 필요해?" 하고 "우리 삶이 돈 갖고 사는 삶이 아니잖아." 하며 웃는다.

매순간 노력했지만 고통받으며 살아왔다. 고통 속에서도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며 불평 없이 살아왔다. 바랄 건 아무 것도 없다.


(글쓴이 덧붙임) 주한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삶의 터전을 잃고 재차 실향민이 될 위기에 놓인 평택 팽성읍 주민들 가운데 한 분인 민병대 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새로 썼습니다. 팽성 주민들과의 인터뷰와 미군기지확장 관련 내용은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 홈페이지(www.antigizi.or.kr)를 참조하십시오.
덧붙임

두시간 님은 유랑단 평화바람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