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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경의 인권이야기] 소리 없는 계엄의 공포

5월 5일 대추리에서 보낸 하루

5월 4일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주민들과 시민들의 저항에 대한 정부의 무력진압을 지켜보며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5월 5일 어린이날 아침 아이들을 대충 챙겨놓고 평택으로 향했다. “어디를 가냐?”는 아이들에게 “대추리에 간다.”고 답하자 아이들은 서로 따라오겠다고 졸라댔다. 귀가시간이 많이 늦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대추리에 경찰과 군인아저씨들이 들어와 있어 아이들은 위험하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일곱 살 막내딸아이가 “엄마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며 순순히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등 뒤로 오빠에게 “경찰과 군인아저씨들이 사람들을 잡아간데”라며 조그만 소리로 소곤거렸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집을 나서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이들이 순순히 포기해주어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대추리에 가면 군인아저씨들이 잡아간다!’는 막내딸의 터무니없는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대추리에서는 일곱 살 딸아이의 예측이 그대로 실행되었다.


고립과 핍박 속에서 피어난 우정

오후 늦게 도착한 대추리는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경찰병력이 검문을 통해 외부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차를 돌려 밖으로 나가라는 경찰의 지시에 ‘집에 다니러 가는 길’이라고 우겨서 간신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여기 저기 파헤쳐진 논과 마을과 들녘을 가로막은 쇠철망, 사람들을 감시하는 군인과 경찰들 콘크리트 더미로 변해버린 대추초등학교……. 무엇보다 긴장과 분노와 공포가 감돌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표정들에서 평화로운 한 시골마을이 처절하게 부서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5일 오전 9시, 군이 마을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항의하는 마을주민을 곤봉을 든 헌병이 진압했다. <사진 출처 : 평화바람><br />

▲ 5일 오전 9시, 군이 마을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항의하는 마을주민을 곤봉을 든 헌병이 진압했다. <사진 출처 : 평화바람>



그 무렵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가로막는 군인과 시민들의 대치과정에서 철조망 일부가 뚫리고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행되었다. 들녘 저 너머 달랑 반팔 티셔츠 하나 걸치고 맨몸으로 맞서는 시민들과 황새울 들녘으로 동원되어 나온 군인청년들이 맞붙어 싸우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며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들이란 말인가? 대체 이 들녘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기에 지금 이 나라의 청년들이 서로 갈라져 싸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피와 땀으로 개간한 이 들녘을 미군에게 전쟁기지로 내주기 위해 자국의 군인을 동원하여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외치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핍박하는 이 정부가 누구의 정부란 말인가?

저녁 무렵 자욱한 먼지만 남기고 몇몇은 연행되고 몇몇은 마을로 건너온 상황에서 마을 뒤 공원에서 삼삼오오 촛불을 켜들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 마을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마을 어르신들이 나와 발언을 이어갔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대추초등학교가 30여년 전 비가 오면 다리를 건너지 못해 학교를 갈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이 어려운 살림에 쌀을 모아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교육부에 기증하여 어렵게 지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한 어르신은 “5월 4일의 아픔과 분노가 커서 마을을 떠나고 싶었으나 먼 길을 마다않고 마을을 찾아준 사람들에게 거듭 고맙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울먹거리셨다. “지는 일 귀신이유……. 평생 머슴일 미화원 농사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지만 한 번도 일이 싫은 적이 없어. 지가 이제 여기서 나가면 파고다공원에나 가서 일없이 앉아있어야 할 텐데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대체 농사일 다 놓으면 뭐먹고 살려고 이러는 줄 몰라.” 그러면서 발언 끝에 ‘황성옛터’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주민들은 특히 자신들을 돈 몇 푼 더 받기 위해 이러는 걸로 매도하는 데 대한 분노가 컸다. 평생을 함께 해온 자신의 몸과 같은 땅을 내줄 수 없는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채 무엇이든 돈으로 사고 팔수 있다는 생각에 권력을 휘두르며 얼마나 더 받길 바라고 이러냐고 힐난하듯 나오는 정부와 언론에 울분을 토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평택은 ‘돈이면 뭐든지 사고 팔수 있다’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돈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단면을 선득하게 마주 대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이었다. 전쟁반대와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이 동북아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에서만 평택의 문제를 바라보던 나는 이날 집회에서 평택의 문제가 단지 정치적 사안이 아닌 ‘사람’의 문제임을 느낄 수 있었다. ‘노트북을 가져와 마을 어르신들의 발언을 하나도 빠짐없이 옮겨 적어 사람들과 공유하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소리 없는 계엄의 공포

저녁 8시를 지나 짙은 어둠이 밀려올 무렵 마을 아낙들이 차려내 온 갓 지은 밥과 무생채무침과 콩나물국으로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고 집으로 가려고 일어섰다. 그 순간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오며 “마을 입구를 지켜주세요!”라고 소리를 쳤다. 그리곤 어지러운 군화발소리와 구령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얼굴이 하얗게 상기되어 쫓기듯 뛰어오는 학생들이 보였다. 순간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을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시커먼 어둠 속에 시커먼 옷을 입은 전경들이 마을로 뛰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를 물어볼 새도 없이 그들은 길을 가로막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갔다.

가장 먼저 뛰어나온 탓에 아직 전경들이 마을 어귀를 다 막지 못한 상황에서 뒤로 빠져나온 나는 후배 활동가와 함께 마을 입구에 주차해 놓았던 자동차 속으로 숨어들었다. 후방에 있던 지원병력이 도착하자 내가 숨어든 차는 그들 한가운데 놓여 버렸다. “이런 난감한……” 차창 바로 옆에서 방패가 올라갔다 내려 갔다하는 모습만 시야에 가득했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경찰들이 차에 부딪히는 진동과 구령소리에 정신이 없는 사이 조금 전에 함께 인사를 나누던 인권활동가들과 학생들이 끌려나오고 있었다. 경찰들은 그저 길가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미란다고지’도 하지 않고 사정없이 끌어갔다.

그 와중에 한 여성 활동가가 옷이 벗겨 올라간다고 소리를 쳤지만 대여섯 명의 남자전경들은 무자비하게 여린 그녀를 끌고 갔다. 그 뒤 불법적인 경찰의 연행에 항의하는 천주교 인권위원회 김덕진 등 인권활동가 여럿과 이름 모를 학생들이 끌려나왔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인가? 누구든 거리에 있거나 한마디라도 그들에게 항의를 하면 끌어갔다. 문자로 상황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지나 차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가 보니 모두들 이집 저집으로 피신해있었다.

지난 600일 촛불문화제에서는 평화 기원 연등이 미군기지 철조망에 내걸렸다. 10분만에 철거된 연등처럼, 군병력 투입과 강제진압 반대 염원도 무참히 찢겨졌다. <사진 출처: 평화바람>

▲ 지난 600일 촛불문화제에서는 평화 기원 연등이 미군기지 철조망에 내걸렸다. 10분만에 철거된 연등처럼, 군병력 투입과 강제진압 반대 염원도 무참히 찢겨졌다. <사진 출처: 평화바람>



장대같은 비가 내리는 중에도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이집 저집을 돌며 사람들의 안위를 확인했다. 몇몇 마을 주민은 ‘함부로 다니지 마라. 경찰이 마을을 뒤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며 마을을 돌고 몇몇은 ‘잡아간 사람들을 내놓으라!’며 경찰에 항의를 하러 갔다. 영장이 없이 가택수색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상식과 법이 통하지 않는 상황인지라 다들 평상심을 잃어갔다.

새벽 무렵 마을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연행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홀로 차를 몰고 나왔다. 좁은 마을 진입로를 전경버스 10여대와 승용차 한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사복경찰로 보이는 승용차운전자는 자신의 신원을 알리지도 않은 채 막무가내로 “나갈 수 없으니 돌아나가”라고 했다. 무법천지의 공권력위에 올라선 그는 새벽거리에 마주친 독기어린 여자를 상대로 한껏 거만을 떨었다. “아이가 아파 응급실에 가야하는데 왜 길을 막고 이러냐!”며 소리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자 그제서야 슬그머니 길을 터주었다. 새벽 무렵 경찰의 봉쇄가 풀린 사이 겨우 대추리로 들어가 동료들을 태우고 나올 수 있었다.


양심을 연행하고 구속해 보라!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황금 같은 연휴에 평생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된 이웃을 위로하고 정부의 부당한 행정대집행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아름아름 대추리를 찾아들어 촛불을 켜들었다. 그날 밤 언젠가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의 권좌를 지켜낸 대통령은 그들의 양심을 구속하라며 “전원 연행방침” 아니 “계엄”을 선포했다. 5월 5일 어린이날, 난 오랜만에 어린 시절 경험했던 계엄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래 양심을 연행하고 구속할 테면 해봐라! 이전의 한일합방도 그랬고 유신 때도 그랬고 광주에서도 그랬듯, 양심이 폭도로 불순세력으로 매도당할 수는 있어도 본질이 변화될 수는 없으니 먼 훗날 역사가 말해주리라. 무엇이 국익이고 무엇이 양심이었는지를, 그리고 평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덧붙임

박숙경 님은 '사회복지시설생활인인권확보를위한연대회의'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