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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재개

29일 대책위원회 발족하고 검찰총장 후보에 공개질의

'천인공노할 범죄자' 대 '대표적인 반인권 국가범죄'

"1991. 4. 27.경부터 같은 해 5. 8.까지 사이의 일자 불상경 서울 이하 불상지에서…김기설의 명의의 유서 2매를 작성함에 있어, 김기설은…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한 학력의 소유자로 지식과 문장력이 부족함에도 피고인의 지식과 문장력을 이용…유서를 작성하여 줌으로써…김기설의 분신자살 결심과 결행을 용이하게 도와주어…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한 것이다."

위 인용문은 1991년 있었던 이른바 '유서대필 사건'에 대한 검찰 공소장의 일부다. 여기서 김기설 씨는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현재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전신, 아래 전민련) 사회국에서 활동했고, '피고인'은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씨를 일컫는다. 공소장에 적힌 대로라면 강 씨는 유서를 대필하여 김 씨가 분신자살하도록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 씨는 검찰이 말하는 대로 "목적을 위해서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분자"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게 된다.

기자회견에서 심경을 밝히고 있는 강기훈씨 [출처] 천주교인권위원회

▲ 기자회견에서 심경을 밝히고 있는 강기훈씨 [출처] 천주교인권위원회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29일 전민련 관계자와 당시 유서대필 사건 진상규명 작업에 함께 했던 이들, 인권단체들이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대책위 발족선언문에서 "상식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반인륜적 사건으로 강기훈이라는 한 인간을 패륜아로 몰고 민주세력을 도덕적으로 매장하려 한 것"으로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아울러 당시 법원은 민주양심세력이 제시한 모든 정황자료와 증거, 필적감정 들을 무시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만을 유일한 판단 근거로 삼아 유죄를 확정함으로써 이에 가담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태우정권이 만들어낸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은 그것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모순을 극명하고 집약적으로 표출한 대표적인 반인륜적, 반인권적 국가범죄 행위"라면서 △올바른 과거사진상규명법의 조속한 제정 △검찰과 법원의 자체적인 진상조사와 책임자에 대한 문책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아래 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의 양심선언 △국가기관들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주요 대상 사건으로 삼을 것 등을 촉구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인 '유서대필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강 씨와 김 씨의 명예 회복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검찰총장 후보자에 사건 진상규명 요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강 씨는 "세월이 14년이나 흘렀지만 내게 이 사건은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사"라며 "지금도 어둔 터널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라며 심경을 토로했다. 그리고 자신을 조사했던 검사들을 거명하면서 "그런 그들이 고속 승진을 하여 검찰의 요직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책임이 있는 검사들의 퇴출을 강력히 요구했다. 전민련에서 활동했던 이인영 의원(열린우리당)은 "후배인 김기설 씨가 분신을 한 일로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는데, 선배인 강기훈 씨가 완전히 조작된 '유서대필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면서 "14년 동안 비겁함과 부끄러움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한 채 살아왔다"며 자신이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것을 다짐했다. 공동대표를 맡은 함세웅 신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는 "군사독재 시절 검찰은 안기부 하수인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검찰이 사건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는 점에 주목한다"며 "당시 검찰은 물론이고 사건 판결을 맡았던 법원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책위 발족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함세웅 신부 [출처] 천주교인권위원회

▲ 대책위 발족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함세웅 신부 [출처]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날 기자회견에는 함세웅 신부, 박정기(박종철 열사 부친), 이소선(전태일 열사 모친), 배은심(이한열 열사 모친) 씨 등 유가족, 임기란 전 민가협 상임의장 등 민가협 운영위원, 김경남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변연식 천주교인권위 위원장, 이덕우 변호사 등과 함께 이창복 전민련 전 상임의장을 비롯한 과거 강 씨와 함께 활동했던 전민련 사람들이 대거 참석했다. 대책위는 앞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언론활동과 각 기관에 대한 진상규명 촉구 활동을 전개하고, 5월에는 김기설 열사 14주기 추모제를 계기로 '유서사건과 검찰·사법부 개혁'을 주제로 하는 토론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날 대책위는 30일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갖는 김종빈 검찰총장 후보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도 발표했다. 대책위은 질의서에서 "검찰이 수집한 당시의 김기설 필적 일체, 안기부 등과의 관계기관대책회의 기록 등 일체의 자료를 스스로 국민에게 먼저 공개하고, 조사를 통해 진상을 만천하에 고백할 것"과 "검찰 내부에 과거사진상규명기구를 설치하여 진상규명 작업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또 4월 검찰 정기인사에서 "현재 신상규(현 수원지검 안산지청장), 남기춘(현 서울지검 특수2부장), 곽상도(인천지검 형사1부장), 안종택(인천지검 부천지청장) 등 유서사건 당시 담당 검사들이 검찰의 주요 요직을 맡고 있다"면서 "이 사건을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관련자들을 문책할 의지가 있는지"를 물었다. 대책위는 인사청문회를 방청한 후 논평을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