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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14년째 이어진 진실을 향한 행진

‘유서대필 조작사건과 사법개혁’ 토론회 개최

지난 10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상임대표 이창복, 강기훈대책위)는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유서대필 조작사건과 사법개혁’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4년 전의 사건을 환기하고 현재적 시점에서 진상규명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한 이번 자리에는 강기훈 씨와 그의 어머니 권태평 씨도 함께 했다. 토론자로 나선 임기란 전 민가협 상임의장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억울하고 분한 심정은 변함이 없다”는 말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10일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진행된 토론회

▲ 10일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진행된 토론회



문준영 서울대 법학연구소 상임연구원은 검찰의 수사과정과 법원의 판결문을 분석하면서 “진실은 명쾌하다.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사건 조작은) 정권안보사법과 반공주의사법체계에 안주하고 협력해 온 사법부가 최소한의 직업적 양심을 저버리고 스스로 정권의 시녀가 되어버린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심판받아야 할 자는 강기훈 씨가 아니라 검찰과 법원”이라며 “검찰과 법원이 의식적으로 직무유기를 범하였고 검찰권과 사법권을 이용하여 불법체포, 감금하고 고인과 강기훈 씨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강조했다.

당시 강 씨의 변호인단이 감정을 의뢰한 일본인 감정 전문가 오니시 요시오 씨는 ‘명백히 다른 필적’이라는 감정 결과를 제출했다. 이에 박연철 변호사는 “오니시 씨야말로 감정 절차에 충실했다”고 반박하며 당시 유죄판결의 유일한 증거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문서분석 감정결과에 대해 “국과수는 필적의 희소성에 주목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필적을 대조해도 필적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라며, △당시 국과수의 감정 결과가 며칠 사이에 변하게 되었는지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지금도 검찰이 수용할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에서 오니시 씨의 감정 과정을 도왔던 김경남 목사는 “문서감정을 담당했던 국과수 문서분석실장 김형영 씨, 심지어는 검찰도 유서가 대필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면서 “하지만 정권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어렵기만 한 진실을 향한 행진

진실은 명쾌하지만 현실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일단은 지금의 재심 조항이 ‘새로운’ 증거 요건을 엄격히 해석하여 좀처럼 재심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고 국정원, 경찰청, 국방부와는 달리 법무부와 검찰은 과거사 진상규명 기구 설치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4월 임시국회에서 제정된 ‘진실규명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에서 유죄확정으로 판결된 사건은 일단 제외되고 다시 엄격한 재심 사유 요건에 적용되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강기훈대책위 대표단은 10일 허준영 경찰청장을 면담, 유서대필 조작사건에서 국과수가 했던 역할과 필적 감정 과정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진실을 향한 행진은 어렵기만 하지만 올바로 선 과거의 역사 위에서만이 현재의 정의를 꽃피울 수 있다는 사실은 잊어선 안되는 역사의 교훈이다.

고 김기설 열사 추모제, 유서대필 조작 사건 진실규명 촉구

고 김기설 열사가 분신, 사망한 날은 1991년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김 씨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하였다는 혐의로 3년형을 살아야 했던 강기훈 씨에게 어버이날은 어느 날보다 고통스런 날이다. “목적을 위하여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적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분자로서의 피고인의 비인간적, 반인륜적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으로 매도되었던 강 씨와 그의 동료들은 어버이날이면 어김없이 마석 모란공원에 모인다. 억울하게도 유서 하나 스스로 쓰지 못해 동료가 대필하였다는 모욕을 당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5월 8일 김 씨의 민주화 운동 동료들은 또다시 마석에 모였다. 운동단체를 떠나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도 있고 개인사업을 하는 이들도 있다. 열린우리당 이인영 의원과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의 모습도 보였다. 전민련, 민청련 등의 단체에서 민주화운동을 할 당시에는 한창 나이의 청년들이었지만 이제는 벌써 30대 후반에서 50대 중년의 반열에 들어섰다.


추모제에서는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전국연합, 문화연대, 민가협 등 48개 인권․사회단체 명의의 공동선언도 발표되었다. 이들은 공동선언에서 △법무부와 검찰은 과거사 청산기구를 구성하여 유서대필 사건의 진상을 스스로 고백할 것 △유서대필 사건 당시 사건 조작에 관여하였던 검사와 유죄판결을 내렸던 판사들이 반성할 것 △과거사를 다루는 정부기관 위원회와 이후 구성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주요 조사대상사건으로 다룰 것 등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