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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자백위주의 수사관행, 없앨 수 있다

<기획>형사소송법 개정 이렇게 ④ 증거능력과 피고인의 방어권

2002년 10월 26일 서울지검 특수조사실에서 살인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검사의 지시로 밤샘 수사, 고문 수사 끝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검사는 구속되었고, 이후 특수조사실은 폐지됐다.


자백은 왕?

그러면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일까? 지난해 6월 대한변협은 '형사소송법 개정에 관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면서 위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법원이 재판과정에서 검사의 피의자 심문조서에 대해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여겨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법원이 과도하게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심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검사는 가혹행위를 가해서라도 자백을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사소송법 제312조 제1항의 단서 조항을 개정하여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인정하는 때에 한하여 증거로 할 수 있도록 하여" 검찰에 적극적인 입증책임을 부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자백을 받기 위해서 행해지는 수사단계에서의 강압, 밀실수사와 고문을 방지하여 위법수사관행이 없어지고, 자백에 의존하는 수사관행에서 탈피하여 과학수사에 의한 증거위주의 수사가 정착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더해서 김칠준 변호사는 "위법한 행위로 수집한 증거에 대해 법원이 적극적으로 그 능력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위법하게 수집된 제1차 증거(독나무)에 의해 발견된 제2차 증거(열매)의 증거능력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독(毒)나무 열매이론'을 들면서 "(피고 측에서)불법으로 취한 증거임을 밝히며 법정에서 치열하게 다투지 않으면, 그대로 증거로 인정해 버리는 법원의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피고인이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위법한 행위를 통한 자백이나 증거는 모두 배제되어야만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근절될 것이고, 이럴 때 '자백은 왕'이라는 미신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공소 제기 전 수사기록의 열람·등사권도 보장되어야

이와 함께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사기록의 열람·등사권의 보장 문제도 형사소송법에서 개정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무죄 추정을 받는 피고인이 법정에서 검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재판에 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방어를 위한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수사기록을 재판기일 전에 열람하거나 등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검사는 공소 제기 후 재판기일 전까지 수사기록을 법원에 넘기지 않는 것이 관행이고, 이럴 경우 피고인이나 변호인은 공소장 외에는 피고인이 진술한 기록조차 보지 못한 채 재판기일을 맞는다.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수사기록의 열람을 검사에게 요구하지만, 번번이 묵살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급히 기록을 보기 위한 방편으로 보석을 청구하는 편법을 쓰기도 한다.

이런 관행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는 1997년 다수의 의견으로 "검사가 아무런 거부사유를 밝히지 아니한 채 열람·등사를 거부한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 결정 뒤에 검사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고, 특히 올해 초 법무부가 개정한 '인권보호수사준칙'에 "검사는 공소 제기 후 증거 제출 전의 단계에서 피고인 또는 변호인·보조인이 기록을 열람·등사를 청구하는 경우 수사 기밀의 유지나 사건 관계인의 비밀 보호를 위하여 부득이한 사유가 없는 한 이를 허용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하여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공소 제기 전'에는 수사기록을 열람·등사할 수 없냐는 점에 있다. 영장실질심사나 구속적부심을 변론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이라도 알아야 하지만 현재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민영성 부산대 법대 교수는 "현실적으로 수사절차에서 수사기관에 의하여 유죄 입증을 위한 모든 자료가 수집되고 이것이 공판에서 별 이의없이 사용되고 있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이상 피의자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변호인의 기록 열람·등사권을 공소 제기 이후로 한정하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피의자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민교수는 "수사절차에서 피의자를 위한 변호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이상, 수사서류에 대한 열람·등사권도 허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형사소송법 개정에서 공소 제기 이전의 수사기록 열람·등사권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컴퓨터 디스크 등에 대한 규정도 필요

이와 함께 "사진·녹음테이프·자기 테이프·컴퓨터 기억매체 등 컴퓨터 관련 증거"의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해서는 현행법이 아무런 해석 지침을 주지 못하므로 명문 규정의 신설이 요청된다. 이들 자료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문증거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증거 능력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특별조항이 신설되어야 더 이상의 논란을 없앨 수 있다.

아직 우리는 이런 점들에서 형사소송의 대 원칙인 당사자주의, 무기대등의 원칙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검사에 비해 피고인과 변호인은 방어권을 행사하기 힘든 너무도 열악한 지위를 갖고 있을 뿐이다. 무죄 추정을 받아야 하는 피의자나 피고인에게 자신을 방어할 무기를 제대로 쥐어주는 방향으로 형사소송법이 개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