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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김혜진의 인권이야기

어쩔 수 없는 것이란 없다


나는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되면서 얼마나 무력해지고, 고통 당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다 보면 정규직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우월감을 갖고 비정규직들을 마구 대하는지 보게 되고, 그럴 때마다 분통이 터지곤 했다. 쥐뿔도 없으면서 "난 정규직이니까 쟤들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이 만들어낸 차별에 놀아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갖는 허구적인 우월감의 정체가 어찌 보면 '자기도 살아남을 수 없을까봐 두려워 비정규직을 짓밟아서라도 자기 살길을 마련하려고 하는 고통의 몸부림'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규직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본의 허구적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만, 비정규직을 무시하는 만큼 자신의 존엄성도 파괴된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이다. 정규직들도 그것을 잘 알기에 더 괴로울 것이다. 나는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아니 자본주의 자체가 정말 나쁘다고 생각한다. 인간성을 파괴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짓밟고, 자신마저 파괴하도록 만드는 극악한 제도를 지옥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 지옥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하는 것이 바로 '어쩔 수 없다'는 태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없다. 그러니 모든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정규직들은 열심히 비정규직을 총알받이로 사용하고, 비정규직들은 한 칸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경쟁하고, 죽지 않기 위해 자본에 순응한다.

그러나 정말 어쩔 수 없을까? 신자유주의 장벽은 그렇게 견고할까? 자본주의는 영원할까?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것이란 없다. '어쩔 수 없다'는 그 생각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투쟁'이다. 투쟁은 '어쩔 수 없는 것'이 결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물론 여전히 벽은 두텁다. 그러나 투쟁을 해본 사람은 안다. 그 벽의 두께를. 그 벽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두꺼운 것이 아니며, 우리가 도전한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인간은 투쟁을 통해 발전하고 인간다워진다. 투쟁은 거대한 장벽을 깨는 힘인 '집단성'과 '상호신뢰'를 회복하게 한다. 서로를 짓밟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거부하고 집단이 되어 어깨 걸 수 있기에, 자기가 누구를 향해 분노를 내뿜어야 하는지를 알기에, 그 때부터 노동자는 인간 본연의 공동체성과 신뢰를 획득한 '인간'이 된다. 이런 부딪힘이 있을 때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짓밟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해서 신자유주의의 벽, 자본주의의 벽을 무너뜨리게 될 작은 구멍을 뚫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더 올바르고 실현 가능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부딪힘은 큰 것이 아니다. 정규직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일상의 차별에 저항해보는 것, 한번쯤은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해보는 것, 투쟁의 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동지로 만나보는 것,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규직 노동자들도 자신의 인간성 파괴에 맞서 인간다움을 다시 세우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최후의 '실질적'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김혜진 씨는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집행위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