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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삼청교육 진실찾기, 국가가 나서라


1980년 8월 4일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발표, 같은 날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계엄포고령 13호' 발표. 이로부터 약 넉 달간 이른바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전국에서 6만7백55명이 검거됐고, 그 가운데 3천2백52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으며, 3만9천7백42명이 군부대로 끌려갔다. '죽음의 순화교육'으로 불리는 삼청교육은 그렇게 시작됐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그곳을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기억한다. 가축보다도 못한 수용생활,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다"라는 수칙, 강제노역, 기합과 구타, 심지어 살상까지 서슴없이 이뤄졌던 그곳에서 수용자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당초 4주로 예정됐던 삼청교육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81년 1월 24일 비상계엄 해제가 발표됨으로써 계엄포고령의 효력도 상실됐지만, 수용자 가운데 7천5백78명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이 다시 떨어졌고, 1년, 2년…길게는 5년까지 억류생활은 계속됐다.

당시 검거과정에 참여했던 경찰관조차 "실적 때문에 무고한 시민들도 많이 검거했다"라고 밝힐 정도로 삼청교육은 무작위적으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진행됐다. 89년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군부대 내에서의 사망자는 3백97명, 행방불명자 4명, 상해자가 2천6백78명에 달한다. 이조차도 신고된 숫자일 뿐이다.

정부가 공식입장을 밝힌 것이라곤 88년 11월 26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담화를 통해 "삼청교육 피해자 보상"을 약속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공약(空約)으로 끝났다. 피해자들은 국회에도 매달려봤다. 13대 국회에서 16대 국회까지 회기 때마다 '삼청교육 진상조사와 배상에 관한 특별법안'이 제출됐지만, 한결같이 심의지연으로 자동 폐기됐다.

그리고 지난 23일 서울도심의 한복판에서 중년의 한 남성이 자신의 배를 갈랐다. 삼청교육대에서 당한 고문으로 인해 장애인이 됐다는 이 남성은 자신을 22년간 내팽개친 세상을 저주했을는지도 모른다.

22년이 지나도록 삼청교육의 진실은 야사(野史)로만 떠돌고 있다. 국가가 팔짱끼고 있는 동안, 피해자들의 힘겨운 발품을 통해서만 진실의 편린들이 모아지고 있을 뿐이다. 이제 국가가 나서서 진실을 복원해야만 한다. 피해배상은 진상규명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일이다. 이를 위한 입법이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진실규명이 없는 한, '삼청교육'은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