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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기획기사 학살현장을 가다 (9) 마지막

파리떼로 덮였던 시체 무덤, 진도 갈매기섬


50년 7월 경찰들이 총을 들고 중무장한 채 많은 사람들을 끌고 와 갈매기섬으로 데려갔다.(중략) 한밤중에 일어난 일인데다 주민들을 사살하겠다고 위협해 내다보지도 못했다.(중략) 갈매기섬이 온통 시커먼 물체로 뒤덮여 있고 시커먼 물체가 위아래로 움직여 가까이 가보니 파리떼였고 파리떼 아래로는 시체로 추정되는 하얀 물체들이 수없이 쌓여있었다.(중략) 시체 썩는 냄새가 너무도 진동해 서있기가 힘들었다. <해남신문 2002. 7. 26일자 중 발췌>


진도 수품리항에서 배를 타고 30여분을 가면 그 생김이 갈매기와 닮았다는 갈매기섬이 있다. 무인도인 갈매기섬에서 곡소리를 들었다는 소문이 낚시꾼들 사이에서 무성해, 진도사람들은 의례 물속 원혼으로 여겼다.

지난해 정부는 제주4·3항쟁과 관련해 갈매기섬의 집단유골에 대한 전설을 조사해 줄 것을 진도문화원(박문규 원장)에 요청했다. 그러나 박문규 원장이 지역의 노인들에게서 확인한 것은 한국전쟁 당시 갈매기 섬에서 해남지역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집단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망자 수치와 학살일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1950년 7월 해남지역 곳곳에서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3백50여명이 갈매기섬에 끌려가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7일 10여명의 갈매기섬 피학살자 유족들은 지역언론 및 사회단체 활동가와 함께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섬을 방문, 천도제를 지냈다. 섬 중턱, 동백나무가 빼곡이 늘어선 곳 사이로 천도제를 지내기 위한 상이 차려졌고, 그 뒤로는 최근 박 원장이 수습해놓은 유골이 비닐에 싸여 있었다. 태풍으로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어 바닥이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하얀 유골과 주인 잃은 고무신 등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천도제에 참여한 박미숙 씨(53살)는 당시 갓난아이였고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갈매기섬에서 잃었다. 박씨의 어머니 채은애 씨(75살)는 "당시 경찰이었던 남편은 모략으로 끌려가 죽었다. 수소문 끝에 섬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5명이 저녁에 배를 탔는데 새벽에야 도착했다"라고 전했다. 채씨는 "섬 전체가 시체로 덮여있었다. 서방님은 썩은 채로 (강한 햇살로) 바짝 말라있었다"라며 "그때 내가 안 갔으면 찾기 힘들었지"라고 회상했다.

사람들 눈을 피해 한밤중에 찾아 나선 사람들 중 시신을 못 찾는 경우가 허다했고 아예 이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형을 잃은 오길록 씨(62살, 당시 9살)는 형 철수 씨가 잡혀가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오씨는 "당시 신혼이었던 형을 경찰과 민간인 2명이 집으로 와 잡아가려고 하자 누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이 누이에게 공포탄을 쏘며 욕설을 해,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오씨의 형과 함께 잡혀갔다 살아온 사람이 있어, 그의 안내로 오씨는 64년에야 형의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다.

유족들은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은 집도 웬만큼 살고 동네에선 지식층에 속한다고 입을 모은다.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을 했고 해방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거나 농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라는 것.

실제로, 일제시대 경찰 내에서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쳤던 오홍택 씨도 갈매기섬에서 학살됐다. 농민운동 가담자들도 마찬가지다. 해남군에서 펴낸 역사책 '해남군사'에 의하면, 1946년 11월 11일 해남 농민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단'과 '미곡수집 반대'를 외치며 경찰서를 한날 한시에 습격하는 11월 추수봉기를 일으켰다. 추수봉기는 경찰과 토벌대에 의해 진압됐으며 주동자들은 모두 사살됐거나 빨치산이 됐다. 그 외 단순가담자들은 보도연맹원으로 등록돼 감시를 받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20일 일제 소집을 당했다. 23일 석방됐다가 경찰이 부산으로 후퇴를 결정한 24일, 보도연맹원 60여명은 재소집돼 모두 사살됐다.

그러나 보도연맹원의 수는 '해남군사'가 밝히는 60명 이상이라는 것이 당시 목격자들의 중론이다. 최근 갈매기섬 학살을 기획특집으로 다룬 해남신문에 의하면 '각 면 단위 지서별로 소집과 학살이 이뤄졌고 그 장소가 갈매기 섬'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피난 갔다 돌아온 경찰들이 갈매기섬을 대대적인 살육 장소로 이용했던 사실도 밝혔다.

그렇다면 학살장소를 갈매기섬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해남신문은 진도의 갈매기섬은 해남과 행정구역이 달라 사건은폐에 용이하고 해남에서 쉽게 갈 수 있는 무인도라는 점등을 꼽고 있다.

목격자들을 만나 본 해남신문의 박영자 기자는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주민들이 입을 열지 않는다"라며, "주민들이 마음놓고 증언하려면 특별법이 마련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유족뿐 아니라 경찰이 총을 들고 주민들에게 엄포를 놓는 상황에서도 담 사이로 10여명씩 묶여서 끌려가는 것을 본 사람, 배나 삽 등을 빌려준 사람, 직접 배를 몰고 갈매기 섬에 들어갔던 사람들 중에도 일부가 생존해 있지만 증언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이들 중 몇몇은 누군가가 증언하는 것조차 꺼리며 적극적으로 막는다고 한다.

박 원장은 "인도적 차원에서 갈매기섬에 떼무덤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우고 억울한 원혼들이 한을 풀도록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할 일"이라며 유족들을 추스렸다. 이날 모인 유족들은 조촐하게 유족회(회장 오길록)를 결성해, 갈매기 섬에서 희생된 피학살자들의 유족을 찾는 일부터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갈매기섬 이외에 해남 전역에서 최소한 5백에서 1천명 정도의 주민이 희생됐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