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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기획기사> 학살현장을 가다 (3)

여순사건... 학살로 세워진 나라, 대~한민국

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곧바로 여수를 접수하고, 20일에는 순천을 점령한 후 구례, 곡성, 보성 방면으로 흩어져, 21일 이후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한편 여수에 남아있던 14연대 병사들 일부는 정부군에 맞서 싸우다 24일 백운산과 벌교 방면으로 퇴각해 역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4연대 주력이 떠난 여수는 27일 정부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됐고, 이후 정부군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국가 기강을 세워갔다. 이른바 '반란치하'의 민간인들은 반란이 진압되자 평화 대신 학살을 선물받은 것이다

구례유족회 박찬근 회장은 48년 11월 18일 헌병들에게 연행되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순사건 발발 후 꼭 한 달째,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박 회장은 동네에서 놀다가 아버지를 찾는 헌병들을 집까지 안내했다. 헌병들은 1주일 정도 집에서 기거를 하던 아버지 친구의 짐 보따리에서 책 몇 권을 발견하더니, '친구분과 관련해 조사할 것이 있다'며 아버지를 구례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바로 그날 밤 구례경찰서는 빨치산의 습격을 받았다. 몇 시간의 교전 끝에 빨치산은 물러갔지만, 경찰들의 분은 가시지 않았다. 이때 유치장이 갇혀있던 민간인 72명이 경찰의 화풀이 대상이 됐다. 경찰서 마당으로 끌려나와 그 자리에서 총살당한 것. 이들 중에는 단지 통금시간을 어겼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빨치산 습격과 아무 관련이 없었으며, 조사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박 회장의 아버지도 이때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총살 후 경찰들은 이들의 시신을 경찰서 뒤쪽에 있는 봉성산 자락에 암매장했다. 박 회장은 이듬해 봄 암매장지를 찾았지만, 이미 시신들이 부패한 상태로 뒤엉켜 있어 수습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 회장은 국가가 저지른 살인행위에 대해 이후 제대로 된 항변 한마디 못했다. 처절한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 중 박 회장을 짓눌렀던 것. 그런 와중에 암매장지에는 아까시 나무들이 자라 어지러이 뒤엉켜 있었고, 침묵을 강요당했던 50여 년의 역사와 잊혀지고 있는 학살의 기억 또한 뒤엉켜 있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여순사건조사연구팀장은 "14연대의 '반란'은 10월 27일 끝나지만 여순(학살)사건은 이후 시작된다"라며,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곡성, 보성 등의 지역에서 "학살은 국군이 파견된 '면 단위'로 광범하게 발생한다"라고 밝혔다. 박 팀장은 95년부터 각 마을을 돌며 70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여순사건에 대한 증언을 기록해 왔다.

구례경찰서 학살사건을 포함,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추정하는 여순사건 관련 사망자 수는 현재 1만 명에 이른다. 이는 당시 사건 관련 지역 인구의 1/8에 해당된다. 이들 중 여순사건 봉기 당시 14연대에 의해 학살된 수는 3백 명 정도다. 나머지 95% 정도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다.

국군과 경찰은 진입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반군'이나 '부역자'를 색출해 그 자리에서 혹은 이후에 처형을 단행했다. 여수유족회 김상태 회장의 증언은 이들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한 것인지 잘 드러내 준다.

김 회장의 큰 아버지는 여순사건 진압 직후 진압군에 의해서 붙잡혔다. 14연대가 봉기에 성공한 후 여수 시내에서 인민재판을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는 이유다. 좌익이 아니고서야 인민재판 모습을 찍을 리 없다는 것. 김 회장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구교도소에서 큰 아버지가 처형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 여순사건 당시 부산으로 도망갔다가 몇 달 후 돌아온 김 회장의 아버지도 여순사건의 희생자였다. 경찰은 김 회장의 아버지에게 '왜 도망갔냐'고 추궁하다가, 좌익인사의 사상전향을 위해 만들어진 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김 회장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초기 여수 앞바다 애기섬 부근에서 수장 당했다. 당시 애기섬에선 1백50명 정도의 보도연맹원들이 집단학살 당했다고 한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2개월이 막 지난 시점에서 발생한 봉기으로, 대응 여부에 따라 신생정부의 국가운영 능력을 인정받고 국제사회로부터 독립된 나라로 승인받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제주도민에 대한 진압명령의 정당성을 따지기도 전에, 14연대의 봉기는 '반란'으로 규정되고 신속히 진압됐다. 이때 계엄법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계엄령이 발동되는 위법행위도 동원됐다.

진압 후 좌익과의 관련성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국민들은 모두 색출돼 학살당해야 했다. 당시 좌익과의 관련성은 객관적 기준도 없이 국군에 의해 자의적으로 판단됐고, 좌익이란 꼬리표 앞에는 어떠한 변론도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좌익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였기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좌익으로 지목되지 않기 위해 국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 실제 좌익뿐만 아니라 정부정책에 쓴 소리를 하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가차없이 죽어갔고, 많은 경우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좌익으로 몰려 희생을 당했다.

게다가 여순사건을 계기로 그 해 12월 1일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이러한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합법성까지 부여하게 됐다. 국가보안법은 이후 숱한 인권유린을 낳으며, 독재체제를 강화해 갔다. '대∼한민국'은 여순사건을 학살로 진압하며 세워졌고, 사상시비를 통해 '훌륭하게'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