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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수지김 사건과 국가의 책임


'수지김 살인 및 간첩조작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뒤, 벌써 두 달 여가 지났다. 살인용의자를 뒤늦게나마 '법의 심판대' 위에 세웠고, 15년을 숨죽여 살아왔던 가족들과 고인의 누명을 벗겼다는 점만큼은 무척 다행스런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안기부라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작·은폐된, 이 파렴치한 '국가범죄행위'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건을 공모하고 실행했던 장세동과 그 부하들은 공소시효라고 하는 '법의 한계'를 만끽하며 세상을 조롱하고 있다. '어디 잡아볼 테면 잡아 보라'는 식의 뻔뻔함을 넘어서, 이제는 모든 책임을 말단 직원이었던 김종호(윤태식 담당자, 수배 중)에게 다 뒤집어씌우는 작태마저 보인다. 아마도 김종호가 공소시효의 기간을 버텨주거나, 아니면 어디선가 객사라도 해 줄 것을 바라는 심정일 테다.

이 기막힌 현상을 지켜보면서, 유족과 국민들의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법 감정'이다. 이미 우리는 이근안 사건과 삼청교육대 사건 등 숱한 과거의 사건 속에서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해 왔다. "실정법이 더 이상 정의롭지 못하다면, 마땅히 그 자리를 정의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외국 학자의 말과 같이, 불의한 법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만은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나라당 인권위원회는 이러한 '공소시효'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형사소송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국가기관의 증거인멸, 범인도피, 직권남용, 직무유기 등의 행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방안이 논의중이라고 한다. 5공의 적자라고 할 한나라당에서조차 이러한 논의가 진행중인데, 정통 민주세력을 자처해온 민주당과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장 국정의 최고 책임자부터 유족들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마땅할 일이며, 국회에서는 적극적인 입법계획을 마련해야 할 때다.

혹자들은 '공소시효'를 건드리는 것이 위헌 소지가 있고, '법의 안정성'을 해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법의 안정성은 법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지지와 동의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평범한 국민들의 상식이다. 특별법을 만들든, 일반법을 고치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의가 회복되는 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제2, 제3의 장세동으로부터 조롱당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