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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하루소식 2천호 기획 ‘인권하루소식의 발자취’ ⑦ 1999년을 돌아본다!

인권대통령? 반신반의에서 분노의 단어로

김대중 정권 출범 당시 경제위기 탓에 주어졌던 ‘난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란 면죄부는 집권 1년이 지나면서 그 수명을 다했다. 98년에 이어 99년 방미에서도 ‘자유의 메달’을 받아 목에 건 ‘인권대통령’은 ‘인권에 대한 헌신’ 서약에 계속 배신을 때렸다. <인권하루소식>에는 1년내내 각계의 분노가 넘실거린다.


국보법․양심수, 21세기로 끌고가다

취임 1주년 기념 특별사면이나 8․15사면이나 ‘준법서약서’의 고집으로 각각 43명, 56명의 양심수 석방에 그쳤다. 미결수는 전원 배제되었고, 정치수배자에 대한 수배해제조치도 생략되었다. 특히 8․15사면은 ‘김현철 사면에 양심수 끼워 넣기’란 비난을 면할 길 없었다. 전체 양심수 중 22%만을 석방하면서 그것도 만기출소를 불과 두세 달 남긴 사람들로 채웠기 때문이었다.

한편 국보법 개정안은 국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신부들의 단식과 삭발, 교수들의 시국농성, 유엔 인권이사회의 폐지 권고, 전국적인 연대기구의 출범에도 정치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법 좌초

1월 9일 당정협의를 통해 재개된 국가인권위 설립 논의는 법무부의 ‘특수법인’ 고집에 말려들었다. 여당은 인권단체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기습적으로 법무부안을 밀실 합의, 국무회의를 통과시켰다. 인권활동가들은 일주일간의 단식농성으로 맞서며 “김대통령에 대한 희망이 실망으로 변하고 그리고 다시 분노로 변하는 과정”이라 표현했다. 거세고 지속적인 ‘법무부안 철회’ 요구에 김대통령은 ‘국회상정된 법무부안을 강행처리 않겠다’로 물러섰다. 그렇게 국가인권위법은 또 해를 넘긴다.


집시법 개악안 날치기

집회의 금지․제한 사유를 대폭 강화한 집시법 개악안이 4월 27일 밤 10시, 국회의장의 “이의 없습니까?”라는 말 한마디에 가결돼 버렸다. 5월 3일 본회의에 상정하겠다더니 그야말로 ‘슬쩍’ 날치기 해버린 것이었다. 그후 개정 집시법은 예상했던 대로 상습적인 집회금지와 집회방해를 일삼았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98년 말 시작된 유가협의 국회 앞 농성이 1년 동안 피눈물을 집어삼키고 12월 30일 끝난다. 12월 28일에야 ‘민주화운동관련법’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문제를 잔뜩 안은 채 통과된 것이다. 두 법안에는 그토록 뜸들이던 김대통령은 박정희 기념관 건설에 선뜻 1백억원을 국고지원 하겠다고 나섰다. 과거도 과거 나름이었던 것이다.

80년대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11년간의 도피생활 중 10월 28일 갑자기 자수했다. 그의 출현에 ‘고문과 같은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적용반대와 처벌 촉구가 이어졌지만 검찰은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지문날인 거부운동

68년 이후 아무런 이의 제기없이 시행된 강제지문날인 조치가 처음으로 시민사회의 저항에 부딪힌 한해였다. 정부가 5월 27일부터 구 주민증을 플라스틱 주민증으로 대체하는 작업을 시작하자 ‘지문날인거부 사회인사 선언’, ‘지문날인 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헌법소원’ 등 저항이 시작됐다.

99년 말 민중대회가 내건 국보법 철폐, 농가부채특별법 제정, 정리해고 중단 등 산적한 과제를 뒤로하고 민중대회 주최측 48명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된 가운데 배신으로 점철된 99년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