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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하루소식 2천호 기획 ‘인권하루소식의 발자취’ ① 1993년을 돌아본다!

‘문민적’ 인권개선, 싹수 노오랬다


93년 9월 7일 창간한 인권하루소식의 2천호 발간(12/18)을 맞아 그 발자취를 돌아보는 기획을 12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93년에 출범한 ‘문민정부’는 전격적인 군․정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90% 이상이라는 놀라운 지지율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 드라이브’가 객관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군부세력 중심의 집권여당 내 소수 계파였던 김영삼의 국가권력 중심으로 이동하기 위한 도박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애초에 인권개선을 위한 청사진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93년은 인권실현에 대한 국민의 꿈이 다시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이었다.


과거청산과 ‘쿠데타적’ 사건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인권문제의 청산은 “어둠의 한 시절을 종결”짓겠다고 표방한 ‘문민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의 해직자, 고문피해자들, 조작 ‘간첩’들, 42건의 의문사 사건, 종군위안부 등등 문제는 김영삼 정부의 관심 밖에 있었다. 특히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던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항쟁에 대해서도 김영삼 정부는 첫판부터 “‘쿠데타적’ 사건”이라는 엉거주춤한 규정을 내리면서 처리를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문민정부’의 한계를 드러낸 ‘쿠데타적’이라는 말은 비꼬아 처음으로 ‘문민적’ 정부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인권하루소식> 창간호(93, 9 7)였다.


‘신 국가보안법 시대’ 막이 오르다

93년은 재야운동의 위축으로 말미암아 시국․공안사건이 1/4로 뚝 떨어진 시기였다. 그럼에도 연말까지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103명을 헤아렸으며, 전체 시국․공안사건에서 국가보안법 사건 비율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1994년 2월에 83.3%) 즉 93년은 ‘신 국가보안법 시대’를 예고하는 해였던 것이다. 울산대 조국 교수, 인권운동가 노태훈 씨, 이른바 ‘남매 간첩사건’의 김삼석․김은주 씨 그리고 pc통신 동호회에 토론자료를 올린 김형렬 씨 등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특히 김형렬 씨 사건은 우리 나라 최초의 pc통신 국가보안법사건으로 기록된다.


새로운 경향, 최초의 사건들

93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새 시대’를 예고하는 해였다. 인권에 대한 ‘문민적’ 정권의 무관심과 관계없이 새로운 유형의 인권사건, 인권개선을 위한 새로운 시도들이 물결쳤다.

3월 19일 인민군 종군기자 출신인 이인모 노인이 판문점을 통해 43년만에 고향인 북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 후 장기수의 인도적 송환은 인권운동의 큰 과제로 떠올랐다. 여성 인권분야에서 서울대 우 조교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최초로 공론화된 성희롱사건으로 기록된다. 여자 조교를 상습적으로 성희롱 해온 신정휴 교수에 대한 우 조교의 투쟁은 “직장 내 여성 성희롱 경험 87%”라는 남성천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성폭력방지법’ 제정에의 길을 열게 된다. 또한 14년간 남편에게 구타당하며 살다 이 해 2월 남편 살해에 이른 이형자 씨 사건도 우리의 인권의식에 새 장을 여는 경험이었다.

한편 5월부터는 처음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 당직변호사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가 과거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불법연행, 가혹행위 등 잘못된 수사관행에 쐐기를 박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리 사회에서 최초의 사건들은 대거 국제인권분야에서 왔다. 1993년 6월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한 한국의 13개 민간단체 활동가들은 이 대회를 계기로 처음으로 ‘국제인권’에 눈을 떴으며 넓어진 시야를 가지고 인권운동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1993년 말경,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계기로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구호가 지겹도록 외쳐지기 시작하는 가운데 국민들은 ‘문민적’ 정권의 인권개선에 대한 기대를 ‘학실히’ 접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