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껍데기만 남은 인권위법은 가라


차 떼고, 포 떼고, 결국 껍데기만 남았다. 지난 12일 민주당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효성과 독립성을 결정적으로 훼손하는 최악의 법안을 내놓았다. △독립적인 시행령 제·개정 권한 △수사기관의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조사권 등 알맹이 조항이 모조리 삭제되거나 축소됨으로써, 인권위는 설립되더라도 사실상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하게 됐다. 민주당은 기득권 유지에 총력을 기울인 법무부에 질질 끌려 다니다 최대의 악수를 선택한 꼴이다. 이에 인권·사회단체들은 민주당 안을 전면 거부하고 나섰다. 14일 민주당 당무회의에서 법안이 최종 논의될 예정이지만, 이 자리에서 법안이 수정 또는 철회될 전망은 거의 없다.


법무부의, 법무부를 위한, 당정협의

민주당은 인권위법 문제에 있어 시종 법무부에 끌려 다닌 결과, 민간단체와의 합의조차 뒤엎었다. 최근 세 차례에 걸친 당정협의는 어떻게든 인권위의 실효성을 약화시키려는 법무부의 의도가 하나하나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지난 1월 19일 민주당 내 '인권법 7인 소위'는 민간단체와의 합의를 바탕으로 "시행령을 인권위에서 제정하고, 인권위원회의 조사대상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며, 상임위원은 4명으로 둔다"는 것 등의 시안을 확정한 바 있다.

그러나 2월 7일 당정협의에서 인권위원의 명예훼손 면책특권과 증인신문권을 삭제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9일 협의에서는 인권위 상임위원의 숫자를 3명으로 축소하는 한편, 시행령 제정에 법무부의 개입을 허용하기로 했다. 또한 포괄적으로 규정됐던 인권침해 조사대상이 '자유권적 기본권' 영역으로 한정되고, 평등권 침해 및 차별행위는 '성·종교·장애·나이, 고용·재화 및 용역의 이용·교통수단과 상업시설 이용·교육기관 및 취업훈련기관 이용'등으로만 한정되었다. 이 규정은 여성차별이나 노동영역 등을 인권위의 조사영역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 측은 이제 와서 민간단체와의 합의 사실조차 발뺌하고 있다. 14일 민간단체 관계자들을 만난 이종걸 민주당 인권위원장은 "1월 8일 만남은 간담회였을 뿐이며, 합의가 아니라 의견청취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결국 인권위법 논의과정에서 드러난 민주당의 태도는 어설픈 알리바이 조작일 뿐이었다.


인권활동가들, 민주당 점거농성 전개

민주당의 인권위 법안에 대해 인권·사회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올바른 국가인권기구실현을 위한 민간단체공동대책위'는 13일 오전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법무부 눈치보기로 일관하며 국민의 인권향상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외면한 민주당에 깊은 분노를 느낀다"며 "민주당 안을 전면 거부한다"고 밝혔다.

이어 인권단체 활동가 25명은 오후 들어, 여의도 민주당사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임기란 민가협 상임의장,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이창수 새사회연대 대표 등 25명의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이날 오후 2시40분 경 '김중권 민주당 대표와의 면담, 법안 철회'를 요구하며 민주당 민원실에서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민주당 쪽에선 이종걸 인권위원장이 찾아왔을 뿐, 김중권 대표는 나타나지 않았다.

밤 10시 45분까지 계속되던 농성은 경찰병력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이날 민주당에선 농성자들에 대해 '퇴거'를 요청한 사실도 없었고, 심지어 민원실 책임자가 '책상 위 문서들만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퇴근한 상황이었으나, 경찰은 '불법점거'라는 핑계를 대며 강제해산에 나섰던 것이다. 해산 과정에서 서준식 대표가 전투경찰에 의해 네 차례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으며, 건물 밖으로 끌려나온 농성자 전원이 40여분간 민주당사 앞 도로에 강제 구금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또 농성소식을 듣고 찾아온 박석운 국보법폐지국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과 이태호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 역시 민주당사 밖에서 1시간여 동안 전경들에게 둘러 쌓인 채 노상감금을 당했다. 농성단의 한 참가자는 "민주당 내에선 이미 '모든 게 다 끝났다. 속 시원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한편, 이종걸 인권위원장은 농성단과 만난 자리에서 "인권위법 시행령 제정에 법무부장관과 협의토록 한 부분에 있어, '협의'는 합의보다 강도가 약한 것으로 만일 법무부에서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냥 인권위원장 의사대로 하면 된다는 뜻"이라는 등 궤변을 늘어놔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반박을 받았다. 그는 "법무부 의견을 무시하고 법안을 낼 생각도 있었지만, 여당과 법무부 사이의 관계를 고려해 조금씩 주고받으며 양보를 했다"며 정작 당정'협의' 과정에서 법무부에 끌려다닌 민주당의 태도에 대해선 변명으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