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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특별기고> 매향리, 비로소 'NO'라고 말하는 한국 땅


60대의 아버지 뻘 신부와 30대의 아들 뻘 신부가 덥석 부둥켜안았다. 한동안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굵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문정현 신부와 최종수 신부는 이렇게 화성경찰서 면회실에서 생환의 기쁨과 설움을 나눴다. 불과 하루만의 재회였지만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6월 20일 오전 11시, 최 신부는 죽음을 무릅쓰고 폭격연습이 진행중인 농섬을 향해 몰래 길을 떠났다. 그때부터 문 신부의 가슴은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매 순간을 기도하며 견뎠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통한과 울분이 덩어리째 넘어왔다. 최 신부는 6km 떨어진 곳에서 배를 내린 후 뻘밭을 걸었다. 때로는 무릎까지 빠지면서 뙤약볕 속을 마냥 걸었다. 농섬에 다 왔을 때 미군 헬기가 두 번이나 정찰을 돌았고 결국 발견되었다. 죽기를 각오했지만 막상 미군 헬기가 농섬에 기총소사를 뿌려대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같은 시각 문신부는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미군헬기의 움직임을 분 단위로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 끝에 두 신부님은 또 우셨다.

최신부는 자신을 찾아낸 후 겁을 줄 목적으로 5백 미터 떨어진 농섬에 유유히 기총소사를 퍼붓고 돌아간 미군헬기의 모습이 "바로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대하는 태도이자, 매향리의 원인이고 미군범죄의 뿌리"라고 단언했다. 한 젊은 평화운동가는 그날 오후 집회에서 "바로 그 순간 미국은 한국의 양심에 기총소사를 가한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 자리에서 이미 죽은 몸이 되었다"고 절규했다. 그렇다. 주민 2500명이 살고 있는 마을의 코앞에 사격훈련장과 폭격연습장을 운영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미국에는 물론 미국이 주둔한 어떤 다른 나라에도 없다. 집회 때의 단골 구호처럼, "클린턴 대통령과 미군사령관은 매향리에 와서 3일만 살아봐라!" 그리하여 "고막이 찢어지는 소음과 창자가 떨리는 진동"을 온몸으로 느껴봐라. 실제로 A10기와 F16기가 마을 어귀의 두 나무 사이를 초저공으로 날아들며 표적을 향해 발사하는 "찌디딕" 소리는 내장을 울렸다. 얼마나 낮게 날면 헬멧을 쓴 조종사의 뺨이 보일까. 전봇대에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날아와 기총소사를 내뿜고는 급상승한 후 좌측으로 타원을 그리며 다시 돌아오는 1분 남짓한 시간은 굵고 깊은 굉음이 온마을을 짓누르는 시간이자 통한과 분노가 가슴을 찢는 시간이다.

매향리에서는 이런 끔찍한 광경이 하루 평균 200번 되풀이된다. 50년 동안 한결같이. 그것도 눈떠서 눈감을 때까지. 추석에도, 설날에도 쏘아댄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는 멈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서양속담도 있건만, 안하무인이요, 오만방자의 극치다. 매향리는 팔레스타인이지 로마가 아닌 것이 틀림없다. 이런 매향리에 한국 정부는 있었던 적이 없다. 요즘에도 정부측 인사는 보이지 않는다. 애꿎은 동네 의경들만 방패막이로 동원될 뿐이다.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방패를 사이에 두고 몸싸움을 벌인다.

매향리에서 한국은 주권국가가 아니다. 이미 미국 정부의 비공개자료를 단순 추종해서 폭탄피해가 없다고 발표한 못난 나라다. 매향리에서 미국은 인권국가의 허울을 집어 던졌다. 매향리의 미국은 깡패국가(rogue state)일 뿐이다. 한미간의 진정한 선린관계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매향리에 가서 반미구호를 외치고 못난 정부를 꾸짖어야 한다. '깡패국가'와 '비겁국가'의 그릇된 유착을 인권과 평화의 바른 연대로 이겨내야 한다. "미군 손에 죽지 못했으니 이제 항의단식해서 자진할 생각"이라는 최 신부님의 단단한 각오로, 또한 심장병을 앓으면서도 민족의 자존과 자주를 위해 동조단식을 결행할 생각이라고 담담히 말씀하시는 문 신부님의 흔쾌한 용기로!

곽노현 교수(방송대, 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