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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4·3은 반공주의의 폭력과 공포였다”

<주요내용> 제주 4·3 제5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 정해구(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제주 4·3항쟁과 미군정

4·3의 책임문제를 논할 때, 좌우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불가피했던 차원보다도 한 고립된 섬에서 약 1년 사이에 무려 3만명이라는 사람들이, 특히 대부분 무고한 양민들이 조직적으로 대량학살된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4·3의 발발과 확산, 그리고 그에 따른 대량학살의 핵심적 요인중에 하나는 미군정 정책의 실패였다. 현재 대부분의 분석은 우익단체-경찰-미군정의 책임문제를 뭉뚱그려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경찰-우익단체 등은 위계적인 상호 연계를 지녔으면서도 동시에 상호 독자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해자 집단 각각의 책임문제가 거론될 필요가 있다.

4·3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는 제주도의 갈등이 제주도 자체의 좌우 대립 형태가 아니라, 중앙으로부터 침투해 갔던 반공적 통제력과 이에 저항했던 주변지역의 좌파 및 민중간의 갈등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김순태(방송대 법학과 교수)-제주 4·3당시 계엄의 불법성

계엄법이나 일제하 '계엄령'에 의하더라도 부득이한 경우 가옥을 소훼하거나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까지는 규정되어 있지만 재판도 없이 양민을 학살해도 좋다는 규정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토벌대의 양민학살행위는 반인도적 범죄로서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조치가 강구되어야 한다.

4·3당시 게엄은 1948년 11월 17일 선포되었다. 그러나 계엄법의 제정은 제주지구 계엄선포 1년 후인 49년 11월 24일에 있었다. 4·3당시의 계엄은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국가긴급권의 행사가 법적 근거없이 행사될 수도 있다고 보더라도 4·3당시 계엄하에서 자행된 토벌대의 만행은 어떠한 식으로도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다.


▶ 황상익(서울대 의과대학 교수)-의학사적 측면에서 본 4·3

집단학살과 그보다 더 심하고 끔찍한 인간성 유린의 '집단광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4·3때의 만행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빨갱이'다. 당시의 하수인, 현장의 가해자들은 인간을 학살하고 인간에게 반인간적인 행위를 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닌 '빨갱이'를 죽이고 유린한 것이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4·3 비극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아닐지 모르나 4·3의 비극을 잉태한 가장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빨갱이'는 현대판 문둥이다. 우리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그동안 '죽어야 할 자', 더 나아가 '죽여야 할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20세기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리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병리는 '빨갱이'를 통해 외화하여 왔다.


▶ 박명림(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실장)-제주4·3과 한국현대사

10월 여순사건 이후에는 수백명씩 죽어가는 집단참살이 이어졌다. 제주에서의 지속적이고도 계획적인 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이른바 '국가테러리즘'의 전형적 실례를 구성한다.

제주 4·3은 단순히 좌파 대 우파, 남한 대 북한, 분단 대 통일, 제국주의 대 민족해방세력의 갈등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 이 사건은 육지 대 변방, 중앙 대 지방, 지배전통 대 저항전통, 문명 대 전통, 기계 대 인간, 국가권력 대 민중 등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었다. 이중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지방, 변방, 독립, 고립, 자치, 자율, 저항의 전통을 강하게 갖고 있던 제주공동체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파괴와 억압이었다.


▶ 김성례(서강대 종교학과 교수)-근대성과 폭력

4·3사건은 북한체제에 대적하는 반공정치의 '희생적 질서'를 정립하는 데 있어서 자의적으로 선택된 희생양이었으며, 제주사람의 무고한 죽음은 반공국가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제의적(祭儀的) 희생이었다.

한국의 근대성은 양민의 무고한 죽음과 반공주의 공포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4·3의 역사적 사실은 공산폭동이나 민중항쟁이라기 보다 바로 반공주의 폭력과 공포이다.

도정부와 도의회가 4·3추모제를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현재의 상황은 4·3의 진정한 애도자가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뒤바뀌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4·3추모제의 공식적 담론으로 등장한 "용서와 화합"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4·3의 역사적 진실에 대한 논쟁을 서둘러 종결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혐의가 있다.
-3월 28일 성균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