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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현장을 뛰는 사람들 ⑨ 김학철 (전국추모단체연대회의 기획국장)

10년을 복직투쟁의 한 길에서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87년 4월 21일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당시 노동조합은 조합비만 거출 하고는 조합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합원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동에는 임금인상이라는 것 자체가 없던 시기였고 1년에 두 번 호봉을 2백50원 올려주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습니다. 이 봄에 저는 꿈에 그리던 현장으로 돌아가 조합원들과 함께 일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복직을 가로막을 수 없으며 어떠한 이유로도 복직문제를 뒤로 미뤄 둘 수 없습니다.”

한 노동자의 복직투쟁 10년의 세월이 담긴 이 유인물은 지난 4월 21일 인천 (주)경동산업 앞에서 출근길 노동자들에게 나눠졌다. 흰머리가 희긋한 곱슬머리에, 마른 얼굴에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햇볕에 그을려 거무스레한 김학철(40) 씨는 일주일에 3일은 아침 7시20분이면 어김없이 출근투쟁을 나간다. 10년을 한결같이 해온 일이다. 그런 만큼 올해야말로 기필코 복직을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를 만난 곳은 경동산업이 아닌 동대문구 창신동에 위치한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세들어 사는 「전국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 단체연대회의」(상임의장 이창복, 전국추모연대회의)에서 였다. 그는 전국추모연대회의 기획국장으로, 나머지 3일은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경동산업 노동자로 86년 입사

그가 경동산업 노동자로 일하게 된 것은 86년 2월이다. 80년 광주민주항쟁을 겪고 암담함 끝에 군대를 가게된 그는 82년 허리디스크로 병가 제대를 하게된다(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안 좋다). 군대를 가기 전 대학교를 다녔지만 등록만 했을 뿐 제대로 다니지 않았던 그는 복학 대신 새문안교회 청년회에서 활동을 벌인다. 2년여 동안 교회활동을 하면서 그는 다른 고민을 하게된다.

“당시 동일방직사건,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등을 접하게 되었지요. 너무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자책감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현장을 찾아 나서게 된 겁니다.”

당시 경동산업의 근로조건은 어떤 사업장보다도 힘들었다. “현장을 갈려면 먼저 경동산업으로 가라”고 할 만큼. 경동산업은 날마다 30명씩 모집했다. 하루에 30명이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동에서 1년 2개월을 다녔다.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지금은 노동자가 3백30명으로 감소되었지만 당시에는 4천명이나 되었다. 5백대의 프레스기계가 돌아가는 경동에서는 하루에도 몇 사람씩 병원에 실려갔다. “경동에서 일하는 동안 저도 50바늘을 꿰맸지요. 8-9개월 동안 매일같이 피가 났어요. 하루는 아무데도 안다치니까 이상하더라구요.” 87년 4월 21일 임금투쟁을 준비하던 중 발각되어 해고를 당하고, 임금인상투쟁이 벌어지지만 결국 14명이 해고당한 채 실패로 끝났다.

긴 세월만큼 가슴에 생생한 사건들이 많다. 87년 노동자 총파업투쟁 당시, 8월 17일부터 14일간 진행된 경동산업의 파업투쟁, 89년 9월 징계철회와 어용노조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중 분신 사망한 노동자 김종하․강현중 씨의 모습, 94년 56일간의 텐트농성, 하루도 거르지 않고 7백일간 벌인 출근투쟁… 그리고 드디어 96년 노조 선거에서 복직노동자가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내가 제일 행복했던 때는 출근투쟁을 벌이다 구사대에 얻어맞기도 하고, 치안본부에 끌려가기도 했다. 때로는 회사측으로부터 유혹도 있었는데 87년에는 “1억을 줄테니…”, 94년에는 “특약점을 차려줄테니 그만 두라”는 제안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노동현장으로 가려는 의지는 굳어져 갔다.

“살아오면서 제일 행복했던 때는 현장에서 일할 때입니다. 눈빛만 봐도 동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죠. 노동자의 건강함이, 그 애뜻함이 무엇보다 좋습니다. 해고된 다음에도 그 힘은 커다란 동력이 되어왔습니다. 회사측에 지기 싫은 마음도 여기까지 오게 한 힘입니다.”

그 과정 속에 87년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가 창립되었고, 그는 경동산업 담당자로 지금까지 줄곧 일해왔다(부인은 87년 그곳에서 함께 일한 해고노동자다. 지금은 환경관련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에 미안한 마음이 더욱 깊다).


내가 사는 이유

91년 발족한 전국추모단체연대회의 기획국장으로 일하게 된 것은 96년 가을부터다. 그때부터 열사추모 및 기념주간 선포, 열사력(달력) 발행, 열사회보 발간 등 열사들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사업을 활기차게 추진해왔다.

“일단 목표를 정하면 하고 만다”는, 그래서 때때로 주변사람들로부터 ‘골통’(?)소리도 듣는 김학철 씨.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를 떠올리며 그에게 ‘사는 이유’를 묻자, “해야할 일이 많다. 해야할 일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 운동의 출발점은 ‘애정’이여야 한다. 자본가는 돈을 사랑하지만 운동가는 조직과 민족을 사랑한다. 애정 없이 시류에 편승해 운동을 한다면 오래갈 수가 없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며 조용하게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