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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세계의 인권⑥ 땅 끝에 선 선주민 (indigenous people)

땅의 일부분인 사람들, 자기결정권의 절실함!

구아라니, 파라카나, 콜라, 토바, 티벳, 오고니, 리수… 이 생소한 이름들은 무엇인가? 아주 오랫동안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왔으나, 이제는 발붙일 곳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그야말로 땅 끝에 서있는 선주민의 이름들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들면 3억이 넘는 이들 인구를 만날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 1백50만,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에 1천3백만, 남아메리카의 고·저지대인디언 1천8백50만, 서아프리카 유목민 8백만, 동아프리카 유목민 6백만, 중앙아프리카의 피크미(PYGMIES) 25만, 동아시아 6천7백만, 남아시아 5천1백만, 뉴질랜드의 마오리(MAORIS)가 35만 명이다.

경제, 정치, 역사, 종교 등으로 우리는 나라별 특성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선주민에게 있어선 문화적 정체성이 모든 삶의 영역에 녹아 있다. 각 선주민이 어떤 문화적 관점을 가졌는가에 따라 그 땅의 자원에 대한 접근방식이 다르며, 그들에겐 땅이 갖는 영적 성격, 주변 경관을 통해 느끼는 역사의 숨길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들의 땅과 호흡할 수 없다면 그 삶은 비참해질 수 밖에 없다.


흔들리는 삶의 터전

북구와 북아메리카의 예를 보자.

에스키모인이 사냥과 수렵, 특히 고래잡이를 통해 살아왔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70년대 이후로 카나다연방어획규제를 이유로 이들의 생업은 불법이 되었고, 실제로 기소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95년 이뉴트(Innuit)의 한 일원이 “우리 사냥꾼들은 부모님께 복종하여 평생 삶 속에서 배워온 것을 했을 뿐이다. 이뉴트의 사냥권리는 어떤 규제나 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굴, 조개 등의 채취를 위해 해변가에 접근하면, 그건 비선주민의 사유지를 침입한 것이다. 선주민에겐 환경파괴와 전통주거지역의 파괴를 불러올 대형댐의 건설이 국가의 신성한 사업일 뿐이다. 92년, 선주민 부모의 동의 없이 인디언 아동과 유아들에게 공인되지 않은 실험용백신이 투여되고 수천명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동의 없이 불임수술을 받은 일이 법원에 제기되었다. 선주민의 문화는 이국적인 눈요기 꺼리인 민속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뿌리깊은 문화적 차별은 헤어나기 힘든 늪이다. 미의회가 만든 ‘알라스카원주민위원회’는 “선주민은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고, 질병과 알콜중독, 자기파괴적 행동, 문화적 붕괴, 자존감의 상실로 고통받고 있다”고 94년 연구보고서에서 자인하고 있다.

러시아의 옐친은 3년 전 선주민에 관한 새로운 입법을 약속했지만 토론에조차 부쳐지지 않았다. 중국은 인구의 8%에 이르는 선주민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과테말라의 치타공힐트렉츠와 같이 외진 곳의 선주민에게는 대량살상, 고문, 강간, 군사점령의 위협이 무섭기만 하다.


쫓겨온 빈민들과의 갈등

개발도상국에서는 그 사정이 더하다. 구조조정의 폭풍은 팔아치우기 위한 자원을 긁어모으게 하고 있으며, 부채국들은 최후 수단으로서의 자원채취를 위해 선주민의 영토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켰다. 에콰도르에서 페루에 걸친 석유탐사와 구야나와 수리남에서의 대량벌목 등이 그 예이다.

구조조정의 주요수혜자는 남·북 모두에서 부유한 엘리트들이며, 이들은 아주 싼 값으로 천연자원을 이용한다. 지적소유권과 특허법은 강화되나, 이 권리는 대회사와 개발권자들의 것일 뿐이다. 국제적으로 형성된 부정의는 국내관계에 투영되어 선주민은 이중고통을 받고 있다.
갈등은 내부에도 있다. 실업과 궁핍을 피해 도시와 농촌의 빈민들은 선주민의 영토로 몰려들고 있다. 이는 때때로 이주정책을 통해 장려되기도 한다. 그 결과는 어김없이 빈민과 위기에 놓인 ‘선주민’ 간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 한 선주민의 장기적인 안전과 그들의 환경은 보장될 수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들 문제회피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선주민 문제를 대하는 국가들의 한계는 그 용어에서부터 나타난다. 사회적 집단으로서 ‘선주민족들(indigenous peoples)’로는 받아들일 수 없고, 개인의 집합으로서의 ‘선주민(indigenous people)’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선주민’이란 단어 자체가 민족으로서의 자기정체성, 자기 영토에 대한 통제, 제도와 문화의 인정과 존중,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로부터 선주민을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자기결정권이 40-60년대에 식민화에 대한 도전을 제공하였고, 그 결과가 독립국가의 형성으로 나타났다면, 그때 이후로 자결권의 개념은 독립국가 뿐만 아니라 그 국가 내에서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관리하길 원하는 선주민족에게도 또한 적용되야 하는 것으로 그 개념이 확대되었다. 따라서 각 국가와 선주민족간에 차별과 억압을 멈출 수 있는 건설적인 협약을 재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주요한 것은 자원에 대한 영토권의 개념으로, 선주민의 삶의 근거인 땅을 보호하는 문제이다. 개인적인 땅 소유자를 구별하자는 것이 아니라 선조대부터 그 땅의 일부분으로 살아온 ‘민족’이라는 점을 보자는 것이다.


유엔, ‘국제 선주민의 10년’ 선포

95년은 유엔이 정한 ‘국제선주민의 10년’이 시작되는 해였다. 이 기간이 끝날때면 선주민 인구는 그들이 속해있는 국가와 평화롭고 역동적인 대화 관계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 세계는 선주민이 문화적, 생물학적 다양성을 유지하도록 적극 원조하게 될 것인가? 선주민의 땅에 가해져온 다국적 기업의 끝없는 자원착취에 대해 어떤 태도의 변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그 대답은 변화의 바퀴를 굴려나갈 선주민 스스로의 노력과 국제적 연대와 지원에 달려있을 것이다.


【류은숙 인권교육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