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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아태 지역 인권워크샵 특집 2 : 국민인권기구란?

편집주: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을 국가 또는 국내인권기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기구의 본래 목적이 국가를 대표한다 기보다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것에 있으므로 이를 강조하기 위해 국민인권기구로 번역하였다.

국민인권기구(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란 사법부와 행정부의 인권관련 부서와 별도로 인권의 보호와 신장을 전문적이고 독립적으로 다루는 기구를 말한다. 국민인권기구는 또한 국제적으로 해당 지역의 지역인권기구 및 유엔의 인권위원회와 유기적인 협조 하에 자국내의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구이다. 이러한 성격의 국민인권기구는 작년 비엔나 인권대회를 계기로 국내 인권운동가 사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박원순 변호사는 월간 신 동아에 기고한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참관기”에서 ‘미국, 영국, 캐나다, 필리핀 등과 같이 인권문제를 총괄할 수 있는 독립된 인권 청 또는 인권위원회(Commission on Human Rights)를 설치할 필요성이 절박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번 제3차 아태 지역 인권워크샵에서 지역인권기구와 함께 국민인권기구는 중요한 의제 중의 하나이다.


국민인권기구의 역사

국민인권기구에 대한 관심은 80년대에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사실 그 기원은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 SOC)가 최초로 이 문제를 다룬 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제사회이사회는 회원국가에게 “각각의 나라에 유엔인권위원회의 일을 심화하는데 협력할 수 있도록 인권에 관한 정보/자료그룹이나 인권위원회를 설립하는 가능성”을 고려하라고 정식으로 촉구하였다.

인권에 관한 국제적인 기준제정(Standard-setting)이 60-70년대에 활발해지면서 국민인권기구에 관한 논의도 활성화되었다. 논의의 초점도 일반적인 문제에서 이 기구를 통해 국제인권기준을 각 나라에서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유엔 인권위원회는 국민인권기구의 기능과 구조에 대한 지침서 초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78년 9월 18-29, 최초로 “인권의 증진과 보호를 위한 국민(National) 및 지방(Local) 인권기구”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작성된 지침은 이후 유엔 인권위원회와 총회에서 승인되었다. 따라서 인권위원회는, 국민인권기구를 아직 설립하지 않은 국가에게는 이 기구를 설립하도록 촉구하였고, 유엔 사무총장에게 기존의 국민인권기구의 활동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청하였다.

상당수의 국민인권기구가 유엔 인권센터의 자문서비스와 기술적 지원(Advisory Service and Technical Assistance)하에 80년대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나라마다 정치 사회적 환경이 다르고 인권과 관련된 법제도가 달라 국민인권기구도 다양한 모습을 띠고 발전해 왔다. 따라서 국민인권기구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다양한 경험을 교류하고 유엔 차원에서 조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90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인권의 보호와 증진에 관련된 국민 및 지역인권기구가 참여하는 워크샵을 개최할 것을 요청하였다. 최초의 워크샵이 91년 10월 파리에서, 2차 워크샵이 93년 12월 튀니지아에서 이어 개최되었다(두 워크샵에 한국정부 대표는 참석을 하지 못했다.)


파리 국민인권기구 워크샵

파리 워크샵에서는 ‘국민인권기구와 국가의 관계’, ‘국민인권기구와 인권관련기구와의 관계’ 그리고 ‘국민인권기구의 관할권(Juridiction)과 권한(Competence)'등이 논의되었다. 이 논의의 결과 국민인권기구의 지위와 기능에 관한 ‘파리 원칙(Paris Principles)’ 이 권고 안으로 채택되어 93년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승인되었다. 이 원칙에 따르면 국민인권기구는 다음의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

1. 인권의 보호와 신장에 관련된 정부의 제반 정책에 대한 보고서, 권고 안, 제안 문을 만들어 정부, 의회 등의 국가기구에 제출하고, 2. 정부가 가입한 국제인권규약을 준수하도록 촉구하고, 3. 국제인권규약을 가입‧비준하도록 권장하고, 4. 가입에 따른 정부의 인권보고서를 작성‧제출하고, 5. 인권의 보호와 신장과 관련된 지역과 유엔의 기구와 협력하고, 6. 제도교육 분야에서 인권교육과 조사연구계획을 지원하고, 7.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각종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노력을 여론화하여 국민의 인권의식을 높인다.

파리원칙은 또한 국민인권기구의 구성과 독립성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기구구성에서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민간인권단체, 노조, 변호사, 의사, 언론인 및 과학자 등 관련 전문가단체의 참여를 강조하고 있으며 자격 있는 전문가, 의회 등의 대표자와 해당 사회의 철학과 종교적 사상의 경향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또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정부의 관련 부서가 참여할 경우 자문자격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점이다. 이밖에도 예산 및 부설기구의 확보, 임기 보장제도 등을 통한 운영의 자율성이 강조되고 있다. 운영의 방법(Methods of operation)에서 파리원칙은 청문회, 조사, 실무소위운영 등 여러 가지 구체적 방법을 거론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인권의 제 분야에서 일하는 민간단체와의 관계증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93년 12월의 튀니지아 워크샵에서는 ‘파리 원칙’을 재확인하고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제3차 회의는 아시아나 남미에서 열릴 예정이다. 또한 지역별 대표를 선출했는데 아시아 지역에서는 인도와 필리핀이 선출되었고 필리핀이 아시아지역의 조정역할을 맡기로 하였다.


93년 방콕 및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의 논의

한편 93년 3월 방콕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 준비를 위한 아태 지역 민간단체회의의 최종선언문에는 국민인권기구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국제인권조약 비준, 인권침해감시, 인권교육 등 국민인권기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정부대표는 성명서에서는 이에 대해 “24. 인권을 진정으로 그리고 건설적으로 신장시키는데 국민인권기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환영하고 또한 그런 기구들의 개념화와 궁극적인 수립이 가장 좋게는 국가들이 결정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93 세계인권대회 자료집, 59쪽 24)고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인권신장에서 가치를 공유할 뿐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데 기초하여 정부조직과 비정부단체간에 협력하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함을 표명하고”라고 언급한 바로 다음의 25항과 매우 대조적이다. 아태 지역의 정부는 결국 원칙적으로 국민인권기구의 설립을 환영하고 민간단체와의 협력 의지도 표명했지만 민간단체가 국민인권기구의 구성과 운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한편 비엔나 세계인권대회는 최종선언문의 V.이행 및 감시방법에서 ‘인권의 신장과 보호를 위해 국민기구를 수립하거나 강화하기를 원하는 국가들을 지원하는 유엔의 활동과 계획을 강화할 것을 촉구’하면서 ‘국민인권기구들 사이에 정보와 경험의 교환을 통하여 협력을 강화’할 것을 장려하였다.


국민인권기구의 종류

현재 약 30여개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는 국민인권기구는 보통 인권위원회(Commissions Committees Councils) 형태이다. 이밖에도 옴부즈맨(Ombudsmen), 중재자(Mediators), 민중의 옹호자(People's Advocates)라고 부르는 유사한 기구도 있다. 둘 중에 하나만 운영하는 나라도 있고 프랑스처럼 두 가지 다 있는 나라도 있다. 또한 이름이 비슷해도 나라마다 구성, 권한과 책임, 기능 등이 다르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인권위원회는 차별(Discrimination)과 관련된 인권침해 사례를 주로 다룬다. 그리고 개인, 사립기관 및 정부의 행위를 인권의 관점에서 다룬다. 그러나 이에 비해 옴부즈맨으로 대표되는 제도는 공공행정(Public Administration)의 공정성과 준법성을 보장하는 기능을 주로 다루며 인권침해도 주로 개인의 청원을 주로 다룬다. 그러나 두 기구 모두 인권의 보호와 신장을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두 기구가 내린 결정은 보통 강제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권고 안의 성격을 취한다.

이밖에 한 사회에서 특별한 인권보호를 필요로 하는 소수의 약자집단을 위한 전문기구(Specialized Institutions)가 독립적으로 설립되는 경우도 있다. 소수집단에는 주로 인종‧언어‧종교에 따른 소수, 원주민‧외국인 이주자‧외국인 노동자‧난민‧아동‧여성‧장애인 등이 포함된다. 이 전문기구는 정부의 정책이 이들 소수집단에 미치는 영향을 인권의 입장에서 감시‧평가하고 개선 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민간인권단체의 참여가 독립성을 보장하는 핵심

파리 워크샵에서 국제법률가위원회의 케마이스 차마리(Khemais Cha-mari)씨는 “유엔 인권센터의 국민인권기구를 설립하고 촉진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특히 남쪽의 민간인권단체의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로 “첫째, 국가가 인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리라고 믿을 수 가 없으며, 둘째, 기존의 여러 국민인권기구가 독재 및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운영되므로 오히려 국민인권기구가 면죄부를 부여하는 역기능을 하기 때문이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서 “국민인권기구가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중립적이고 인권의 대의에 순수한 열정을 지닌 민간인권단체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번 서울 워크샵에서 한국정부가 국민인권기구에 대해 어떤 입장을 표명할지 아직 알려 진 것이 없다. 그러나 최근 다시 자행되고 있는 정부의 불법적 노동운동 탄압과 학생들의 불법연행 등을 볼 때 부정적인 생각이 앞선다. 그러나 ‘소귀에 경 읽기’의 어리석음을 무릎 쓰고라도 이번 기회를 통해 몇 가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국제화 시대에 인권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최근 국제화 및 지구 화 논의와 관련하여 정부의 인권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인권의 입장에서 국제화란 국제인권규약의 수준으로 국내의 인권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는 과거 ‘인권후진국’ 시절 주장했던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인권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유혹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정부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인권을 국제인권기준에 맞게 증진하는 것이 허구적인 국가경쟁력이 아닌 참된 국민경쟁력의 요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지역인권기구 설립에의 적극적 참여도 마찬가지이지만 국민인권기구는 국제화시대를 맞이하여 ‘인권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없이 국민인권기구가 단순하게 행정적 또는 제도적 차원의 문제로 인식될 때 국민인권기구는 기존의 유명무실한 여러 인권관련 제도처럼 반 인권적 제도를 또 하나 만드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윤리’나 ‘도덕’ 대신 ‘인권교육’을

국민인권기구는 인권의 보호라는 소극적 측면에서 인권의 증진이라는 적극적 인권정책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인권교육의 중요성이 다시 제기된다. 외국의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인권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국내 유네스코 위원장이 인권교육에 대한 발표를 하는 것은 그 이유이다). 그러나 국내의 유네스코는 인권교육에 전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전교조 문제가 한참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를 때 한국의 유네스코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요즈음 반인륜적 세태와 이기주의적 풍조를 두고 세상 탓만을 할 것이 아니라 정부는 적극적인 인권교육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제도교육에서 윤리나 도덕 대신 인권을 가르쳐야 한다’는 일부 인권단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역설적으로 철저한 인권교육만이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적 가치관으로부터 건강한 공동체 윤리를 지킬 수 있다.


“자유는 영원한 감시의 대가"

차마리 씨도 지적했지만 사실 권력침해의 주인공인 국가권력이 스스로 국민인권기구를 만드는 것은 모순된 것처럼 들린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핵심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헌법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의 인권보호의무를 갖고 있지만 현실에서 국민인권을 침해하는 주범은 바로 국가권력이다. 국민인권기구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한 제도적 대안이다. 따라서 국민인권기구 설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파리원칙’이 여러 곳에서 강조하듯이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참여 즉 민간인권기구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나 과거와 외국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민간단체의 참여가 저절로 보장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현실은 인권이 국민 각자와 민간인권단체의 끊임없는 감시와 압력에 의해서 보호되고 신장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국인권옹호연맹의 정문 앞에 붙어 있는 “자유는 영원한 감시의 대가(Liberty is the price of eternal vigilance)"라는 구호는 오늘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