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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지치지 않기를

2020년 1월 담당사업이 없어졌다. 해고를 통보받은 날, 전자문서를 조회해보니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사업 취소 요청’과 ‘사업 취소 허가’ 공문 결재를 완료한 상태였다. 비공개문서였다.

두 달 전 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사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고 발생 사업의 운영을 중단하고 담당자도 내보내는 것 아니겠는가? 2019년 11월 ‘지역의 힘’ 행사에서 참석자 40여 명의 피부와 각막이 벗겨지는 사고가 있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내가 담당한 사업의 관계자였다.

나도 피해자 중 한 명으로 참석자 전원에게 연락하여 상태를 확인하고 피해현황을 보고한 후 응급실을 방문했다. 얼굴, 손 등 피부 각질이 벗겨지고 안구가 불타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자 증상을 알리고 인력배치를 요청했지만 거절됐다. 행사총괄자인 000연구원의 결정이었다.
행사는 시작 전부터 문제가 있었다. 자료를 요청하면 결정된 게 없다며 자료를 주지 않았다. 5개월 전부터 논의가 있었는데 행사 날짜 외에는 알 수 없었다. 행사가 임박해서야 최소한의 자료를 전달받았는데 정보가 부족해 현장답사를 다녀오겠다고 하니 현장방문을 불허했다. 행사 전날 다른 기관 담당자와 통화하는데 행사 담당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르는 행사 정보를 알고 있었다. 행사단톡방이 있었던 것이다. 들어가보니 이미 수백 명이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왜 사업담당자인 내가 단톡방에 초대되지 않았을까? 왜 회의 및 현장답사에서 배제되었을까? 왜 환경이 열악한 창고공간에 배치되었을까? 행사총괄자인 000연구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괴롭힘이 만성이 되어도 고통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000연구원은 사고 발생 당일에도 부당한 업무복귀를 요구하며 고함을 질렀다. 실장님께 도움을 요청했더니 혼자 알아서 못하냐는 식이다. 나와 000연구원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외면했다.

실장님은 2017년 여성직원 간담회에서 본인이 성고충상담위원임을 밝히고 여성으로서 고충이 있다면 언제든 실장실로 오라고 했다. 나는 실장님 발언이 끝나자마자 실장실로 달려가 000연구원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성추행 피해로 패닉상태인 동료A에 대해, 또 다른 성추행 피해자인 동료B에 대해, 내가 일상에서 경험한 성추행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실장님은 도움을 약속했지만 그 날 오후 나는 000연구원의 호출로 옥상에 올라갔다. 그는 신고내용을 모두 알고 있었다.

실장님은 약속과 달리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치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계약직으로 1~2달마다 계약을 갱신했기 때문에 불안했다. 신고 다음 달 동료A가 계약만료로 연구원을 나갔다. 그 후로 몇 달 뒤 동료B도 같은 방식으로 나갔다. 나는 담당사업이 국정과제에 포함되어 계약만료 형태의 해고는 피할 수 있었다.

2018년 시험에 응시하여 무기계약직이 되었지만 나아진 것은 없었다. 나와 000연구원은 같은 부서에서 일했고 실장, 본부장은 사업이 타기관으로 넘어갈 예정이니 연구원에 남을지, 사업과 함께 넘어갈지 의견을 물었다. 매번 연구원에 남겠다고 답했지만, 질문은 반복됐다. 사고가 터지자 급박하게 사업운영을 취소하고 해고로 이어진 것이다.

상사의 성추행, 내부고발 은폐, 직장내 괴롭힘, 불완전한 무기계약직 전환, 산업재해, 부당해고로 이어진 일렬의 과정에서 나의 귀책사유는 없었다. 내부에 있을 때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피해를 감수했지만 해고된 이상 잃을 게 없었다. 그래서 싸움을 선택했다.

2022년은 싸움을 선택한 지 2년째 되는 해이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행정소송 1심 모두 부당해고로 판단했고 000연구원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추행으로 징역 1년을 구형받아 법정구속 됐다. 그러나 여전히 해고노동자로서 기관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지난한 이 싸움은 언제 끝낼 수 있을까? 부디 그때까지 지치지 않고 굳건하기를 빈다.